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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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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타래 - 손톱깍기


BY oldhouse 2002-01-09



이십오육년 전 난 대전의 한 육교 위에서 살았다.
모서리가 닳아빠진 조그마한 상자 속에 갇혀 지내다 그나마 햇빛 구경 할 수 있었던 한가로운 오전, 덥수룩한 하얀 수염을 날리며 늘 삼국지를 읊으듯 읽던 김노인과 함께했던 육교위의 삶.
풍족하지 못한 살림에도 맏손자 대학공부를 위해 노인 내외가 고향을 떠나 이곳에 정착하였고 노인은 뜻하지않았던 방물장수가 되었다.
손톱깍기, 거울, 바늘쌈지, 때밀이 타월, 구두주걱, 참빗, 손수건,, 긴 해 그림자보다 더 짧게 차지하던 그만의 전 앞에서 늘 물상처럼 삼국지를 읽으며 소박한 이익을 기다리곤 했다.
그러다 손자의 방학기간이면 덩달아 방학을 즐기듯 고향을 찾아 오랜만에 아들내외의 밥상을 받고 안부를 물어오는 친인척뻘 모든 이들에게 선물을 나눠주었다.
선물이라야 그가 팔던 물건들이었고 나 또한 그런 연유로 육교위의 삶을 마무리하고 허름한 시골 농가에 자리잡게 되었다.
새 주인은 농부였다.
고질적인 무좀에 시달리면서도 늘 장화를 신고 쟁기질을 쉬지않았던 우직한 소를 닮은 사람, 또 그를 영낙없이 닮은 소박한 아내와 다섯남매를 거느린 가장이기도 했다.
난 그때부터 내 본연의 의무이자 일을 하기 시작했다.
주인은 무좀으로 뭉그러진 굳은 살과 두꺼워진 발톱을 깍아냈다.
참으로 고약하고 힘든 일, 보통사람의 새끼 손가락만한 내가 물어 깍기엔 힘겨운 상대였다.
그래도 주인은 나를 애지중지 여기며 먼지 한톨 남지 않게 불어주고 닦아주었다.
그런 세월이 흐르고 세상은 기계화로 드디어 주인이 쟁기와 축축한 장화를 벗어놓을 쯤 흔히들 말하길 살만하다 싶을 때가 되자 그의 아내가 앓아누웠다.
시름시름 앓아오던 아내는 자신을 돌볼 겨를없이 사는데만 열중하다 막다른 벼랑에 서게 된 것이다.
어느날 아내는 엉거주춤 일어서 재봉틀 서랍을 열더니 나를 찾아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손톱을 깍기 시작했다.
하지만 몇번을 시도해도 실금 쩍쩍 간 그녀의 손톱은 깍기질 않았다.
내가 아무리 앙 물고 단번에 잘라내려해도 나를 눌러내리는 그녀 손끝의 힘은 개미 한마리 죽일 수 없는 종잇장같은 가벼움.
그녀는 나를 떨어뜨린채 울기 시작했다.
쇠잔한 그녀는 소리없이 어깨를 들썩거렸고 그저 한참 후에야 내 위에 떨어지던 눈물방울 작고도 작은 한방울은 온 몸을 적시고도 남았다.

지금 나를 멍하니 바라보는 그녀는 두번째 주인 농부의 딸이자 세번째 주인인 셈이다.
그녀는 나를 볼 때마다 엄마를 떠올리는 눈빛으로 젖어들곤했다.
그리고 무정한 세월을 대신 해 줄 남자를 알게되었다.
손톱 끝 봉숭아 꽃물이 첫눈 올 때까지 남아있으면 사랑이 이루워진다더니 꽃물 든 손톱이 이뻐보인다는 남자와 결혼을 하였다.
그래서 그 남자 역시 나의 바깥 주인으로 섬기며 산다.
어쩌다 그녀가 그를 눕혀놓고 발톱이라도 깍아줄라치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내, 지아비인양 입이 쩍 벌어지는 순박한 사람.
나 또한 표나지 않게 유연한 곡선 내 입술이 찢어지게 웃곤한다.

내가 모든이들의 마지막 일부를 톡톡 잘라낼 때 마다 그들을 닮은 이야기가 떨어져 나오고 버려져 잊혀진다.
새롭게 돋아나는 이야기들이 행복하고 따듯했으면 나의 여린 몸과 입과 힘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으면 언제까지나 명랑하게 톡톡 거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