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 : 138

생각타래(2)-호박


BY oldhouse 2002-01-07

다들 나보다 구르는 재주가 있다고하나 그렇지 않다.
오늘만해도 여섯시간 정도를 대신 굴러주는 자동차를 타고 낯선 이곳에 도착을 했다.
소박한 거실 한켠에 자리 잡기 전
오는 내내 생각이 참 많았다.

오랫동안 양파망 그물침대에 누워 내 장기,씨앗이 기증되기를 바라며 봄날을 바라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그날의 아지랑이처럼 또다시 모든게 가물가물 멀어지려한다.

아직은 꽃샘추위가 기세등등하던 날, 노인은 드디어 나에게 눈길을 주었다.
고만고만한 내 또래의 씨앗들을 주루룩 손바닥에 쏟아내리고 또 그러길 몇차례 튼실한것들만 한주먹 선택되었다.
양지바른 채마밭 맨 윗 고랑에 내 장기 아니, 우리들의 장기는 넉넉한 땅위에 나란히 누워 새로운 세상을 향해 기꺼이 한몸 썩어지는 고통을 견뎌내야 하리라.
장엄한 이날의 행사장을 재활용 비닐 차일이 펄럭이며 끼어들고 그들은 끝내 잠시 동안의 우리들의 아늑한 각자의 지붕으로 봉긋 솟아 올랐다.
나는 감겨진 눈을 더욱 질끈 감고 다물어진 입을 더 앙당물고 후끈한 두엄을 한바가지씩 둘러 쓴채 보드라운 흙을 가르는 호미날 소리에 아득한 마취에 빠져들었다.

며칠이나 지났을까.
세상은 소란스럽고 후덥지근한 두엄 이불을 걷어차고 숨막히는 비닐지붕을 뚫고서라도 참았던 숨을 내뱉고 싶었다.
그러면 그렇지, 경험 많은 노인의 손길이 기다렸다는 듯 나를 빤히 내려다 보았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기지개를 켰다.
"어쩌면 이리도 쪼옥 고르게 싹을 틔웠을까나"
드디어 비닐지붕이 열리자 참았던 숨을 내쉬고 며칠새 나의 연두빛 손끝은 진초록 팔뚝을 힘차게 솟구치며 다시 태어나는 기쁨을 누렸다.
내가 태어난 전라도 땅이 시끌벅적 해졌다.
마른 논에 물이 차고 빠알간 무당벌레 같은 트렉타가 바쁘게 논바닥을 파헤치고 고르길 며칠, 세상은 어느새 개구리 소리로 들끓고 하나 둘 못자리 판으로 변해갔다.
저만치 선산을 지키는 늙은 소나무를 배경으로 붉은 황토밭이 더욱 붉어질 무렵 사람들은 시들한 고추 모종과 한판 시름을 하고 바로 이때쯤 노인도 나를 어디론가 떠 이고 가 내려놓았다.
가슴과 눈과 귀 모든게 뻥 뚫릴듯 확 트인 들판, 삽자루 두어개는 놓임직할 농수로 둑이 내가 살아갈 곳 발아래 노인의 논이 양옆으로 나란해 더 든든한 터를 잡은 것이다.

싱그럽게만 쭉쭉 자라고 뻗어나가는 이파리와 덩쿨들 겨드랑이 가려운 날이면 어김없이 꽃대가 비집고 나와 꽃을 피우고 귓가를 윙윙거리는 벌들이 무작정 쳐들어와도 마냥 반갑기만 했다.
모두들 무서워 한다는 말벌이 찾아와도 두려울것 없이 넉넉한 꽃잎을 벌려 안을 수 있고 차고 넘치는 꽃가루 쯤이야 아까울게 없었다.
그리고 나의 전생이 그러했을것 같은 확신으로 가슴 설레던 손톱만한 열매가 맺히고 그것이 점점 자라나는 나날 혼자서 뒤채이기도 힘들정도로 많은 열매들이 덩쿨 마디마디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너무나 서로가 닮아보여서 서로 정겨운 그래도 어딘가 조금씩은 달라보이는 신비로움에 연녹의 지문을 몸 전체에 그려보이는 열성으로 애타하던 녀석들도 있었다.
한바탕 소나기가 하루에도 몇번씩 우리들의 이마를 때리고 가는가 하면 어느날은 뙤약볕 불침으로 고열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노인은 하루도 빠짐없이 우리들의 갯수를 확인하고
몇번인가는 급한 볼일을 참기 힘들었는지 슬그머니 주저앉는가 싶더니 속곳을 훌렁 벗어내리고 솨솨 소피를 보더란 말씀, 나이 팔순이 지난지가 몇해인 노인의 엉받이가 어찌나 희고 튼실한지 농수로 흐르는 물마저 소리를 죽인채 그녀의 엉받이를 오랫동안 비추었다.
하지만 그런날이면 어김없이 노인은 힐긋 웃으며 애기티도 못벗어난 몇을 골라 구부렁구부렁 사라져가고 그들이 애호박전이나 애호박나물이 되어 식탁에 올려지는 기특한 모습에 가슴 찡한날도 있었다.

지난 일요일 노인의 생일날,
대처의 자식들이 모여 들었다.
노인은 신발이 닳게 종종거리며 가꾸고 거두워들인 보물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메주, 흑태, 청태, 깨, 들깨, 팥, 감,,,,,그때였다.
"아이구머니나! 이 호박 좀 봐, 꼭 울엄니 엉받이 같으내이-"
나를 가리키며 마흔을 훌쩍 넘긴 막내아들이 너스레를 떨었다.
"틀린말 아니다. 소피 한방울도 아깝다 죄다 주고 키운 것인께 느그들가져다 묵어라."
갑자기 뭉클한 무엇에 어둠을 마다않고 갇혀 묵상하고픈 날이다.

새주인 젊은 여자가 나를 쓰다듬는다.
매끄러운 손길이지만 차갑다.
하지만 오래도록 나를 짚어보는 손길이 낯설지않다.
아무리 오래도록 나를 짚어본들 봄 여름 가을 그 많고 많은 이야기 한소절 어찌 짐작이나 할까.
난 희고 튼실한 노인의 엉받이 환한 칼라사진 한장만을 기억한채 오래도록 깊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