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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엔 굴비만 있는 것이 아니다


BY 말그미 2001-12-16

< 영광엔 굴비만 있는 것이 아니다 >


영광하면 굴비부터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다.
하지만 영광엔 굴비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내겐 여든 여섯이신 시외할머님이 계시는 곳이 바로 영광이다.
광주에서 둘째 외삼촌과 함께 사시다 병세가 악화되시면서
영광에 사시는 이모님과 이모부님이 모셔가 같이 사신 지 어언 넉 달째.

여든이 한참 넘으신 연세에도 건강하시던 시외할머님은
올 봄에 피부병에 걸리셨더랬는데,
맞벌이에 바쁘신 외삼촌내외가 얼른 알지 못해
초기에 치료를 하지 못하는 바람에 그만 병이 깊어져서
치매증세까지 생길 만큼 악화되더니,
오늘 낼 돌아가실 것처럼 많이 편찮으셨었다.
그래서 다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사람 목숨이란 게 그렇게 쉽게 놓아지지가 않아서
그 힘든 와중에도 하루하루를 힘들게 연명을 하셨다.

그런 상황이 몇 개월 이어지다 보니, 작은외숙모와 십년 간 공들여 쌓아오던
아름다운 고부관계도 무너지고, 철썩 같아 보이던 외삼촌과의 모자관계도,
할머니 손으로 직접 키우신 외손주들과의 관계도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말았다.

사람의 병 앞에 가족이란 이름은 얼마나 나약한 관계로 묶여져있는 것일까?

9년간 집에서 투병생활을 하시다 결국 2차 뇌일혈로 돌아가신 할머니를 둔 나로선
겨우 몇 달의 병치레로 형제들간에 불화가 생기는 모습이 좀 낯설었지만
사정을 듣고 보니, 시외삼촌 가족이 그렇게 서둘러 무너진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시외가엔 내가 전에도 ??던 작은외삼촌 말고 큰외삼촌도 계신데
같이 광주에 사신다고 한다. 그런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거기 외숙모가 도통 외할머니를 모실 생각을 않는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병세가 깊으셔서 병원에 입원해 계실 때도 발걸음 한 번도
아니 전화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었기에
난 혹시나 외할머님이 젊으셨을 적에 며느리인 큰외숙모에게 호된 시집살이라도
시켜서 정나미가 떨어져 그런 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했더랬다.

그러나... 거기에 얽힌 구구절절한 사정을 듣고 보니
그것은 나의 억측에 불과했다.
비록 어머님의 입을 통해서이긴 하지만,
울 어머니를 봐도 그렇고 (어머님은 외할머님을 빼다 박으셨다)
외할머님은 그런 시집살이를 시키실 분이 아니셨다.

광주로 오기 전 원래 고향이신 강진 시골에 계실 때부터,
큰며느리가 광주에서 내려오면(큰외삼촌이 광주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계시다)
한 겨울엔 아궁이에 미리미리 군불을 지펴서 방을 따뜻하게 해놓고 맞아주시고,
며느리가 불 때는 것에 익숙치 않을까봐 땔감 중에서도 가장 예쁘게 다듬어지고
잘 말라서 타닥타닥 잘 타는 땔감만 골라 나무청에 쌓아두시곤 했단다.
그 정도까지 마음을 쓰시며 챙겨주시는 분이었으니 다른 건 말해 뭐할까.
또한 외할머님은 강진에 오랫동안 사시면서 맏며느리로서의 본분이랄 수 있는
시부모 공양과 시댁 사람들 일일이 챙기기, 거기에다 동네 어른들 공경하는 마음까지
극진하고 손끝이 야물어 동네 큰 일 있을 때마다 외할머님 손을 빌리지 않을 때가 없어
동네 사람들은 다들 월평댁은(외할머님의 칭호) 자식농사 잘 지어서
앞으로 두고두고 복받을 거라며 기대와 칭찬을 한 몸에 받던 분이라고 하신다.

그런데 이렇게 애물단지 하나가 큰며느리라고 들어와서 꺼떡하면 아프다고
집안 행사에 안 오고, 자기 집에 시댁 사람들이 찾아가도 소 닭 보듯 하면서
데면데면하는 것도 모자라, 당연히 인사시켜야 할 아이들을 방에다 숨겨두고
어른께 인사도 못 하게 만들었다니...
자신의 아내가 이렇게 큰 잘못을 하면 큰외삼촌은 남편으로서 아들로서
부인을 나무라고 제대로 시어른 공양을 하게끔 해야 했는데,
큰외삼촌이란 분이 어찌나 사람이 물러터졌는지 아무 소리도 못 하고
마누라 눈치만 슬금슬금 보고 말았단다. 그러니,
외할머님도 더는 정이 떨어지고 불편해서 큰아들 집이지만 맘 놓고 발걸음을 못 하셨단다.
그래서 작은외삼촌이 직장을 다니면서부터 외할머님을 모시고 살게 되었다.
마침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셔서 혼자되시기도 했지만, 그렇게 못 미더운 형과 형수에게
어머니를 맡겨놓고 맘 놓고 살 수 없었던 탓이었으리라.

그렇게 해서 모시고 산 게 십 년.
그동안 결혼해서 딸 둘 낳고 외할머님이 집안일과 육아를 도맡아 해주신 덕에
작은외삼촌 부부는 자신의 일에 전념할 수 있어서 성공적인 맞벌이부부로 기반을 닦아
웬만큼 허리를 펴고 사는 집안이 되었다.
그런데 이제 이렇게 살만 하니까....,.
손주들 다 키워놓아서 맘 놓고 노인정도 다니실 만 하니까......
덜컥 건강에 적신호가 온 것이다. (정말 건강이 웬수다.)

외할머님 건강이 좋을 땐 집안일을 도맡아 해주셨기에 맞벌이부부에겐 그보다 든든한
지원군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도와주시긴 커녕 자신들이 옆에서 돌봐야 하는
상황이 되고 보니, 계속해서 외할머니를 모시고 살 명분이 없어진 모양이다.
(사실 그것도 웃긴 생각이다. 토사구팽도 아니고... 당연히 모셔야 할 어머니인데...)
게다가 생각해보니, 자긴 큰 아들도 아니고 둘짼데 왜 이렇게 힘들 때,
자신만 아들 노릇을 해야 하는가 하는 회의도 드셨으리라.

그래 결국 외할머님 모시는 일로 형제간에 작은 불화가 생기고 말았다.
부끄럽게도, 티비나 뉴스를 통해서나 듣던 아름답지 못한 풍경이
우리 시외가에도 생기고 만 것이다.

그 와중에도 큰외숙모는 전화 한 통화 없었고, 누가 집으로 찾아간다고 하면
병원에 입원했다는 핑계로 자리를 비우곤 했다고 한다.
일에 치이고, 집안일로 치인 작은외숙모는 이런 큰외숙모의 처사에 더욱 열을 받아
결국 자신도 어머니를 못 모시겠다고 선언하고 말았다. 큰며느리도 아닌 다음에야
자기 혼자 이 굴레를 쓸 이유가 없다고 판단하셨으리라.
이런 결심의 뒤엔 아파트 바로 옆에 살면서 딸에게 바람을 넣은 작은외숙모의
친정 부모들도 한 몫을 단단히 했다고 한다.

그 동안 외할머니 손으로 직접 키우신 손녀들을 딱 외갓집으로 데려다 놓고부터
그 쪽 사둔들이 작은외삼촌 부부가 직장으로 나간 낮시간에
수시로 외할머니 계시는 집에 드나들며 큰아들, 큰며느리 놔두고
왜 작은며느리인 당신들 딸에게만 의지하냐며 무진장 모진 소리를 해댔다고 한다.
자신들도 아들 낳아 키우면서 곧 장가보낼 입장에 있으면서
어찌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는지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다.
몸도 아프신데다 자식들은 슬금슬금 눈치 보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던 손녀들도 집을 떠나고 없지,
거기에 사둔이란 작자들이 허구헌날 와서 아픈 사람을 그렇게 들볶아댔으니,
멀쩡한 사람도 돌게 생겼는데 안 그래도 자리보전하고 누워계신
외할머님이 팽~~ 돌아버리시지 않은 게 신기할 지경이다.
(외할머님은 지금도 이 일만 생각하면 부르르~~ 떨린다고 하신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자신들도 아들 두고 늙어 가는 처지에,
여러 모로 부족한 자기 딸을 며느리로 맞아들여서
(결혼 후에 작은외삼촌과 외할머니의 배려로 대학을 마쳤다고 한다.
일에 육아에 살림에... 외할머니의 전폭적인 도움이 없었다면
결코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십 년을 함께 지내며 궂은 일 다 해주고,
구박 한 번 하지 않고 보살펴준 사둔에게 따스한 병문안은 커녕 어떻게
그런 악다구니를 퍼붓기 위해 매일매일 자기집 드나들 듯 올 수 있었을까....?
워낙 외할머님이 성정이 곧고 착하신 분이니 그 수모를 견뎠지,
나 같음 가만 안 뒀다.
당장 요절을 내서 발걸음 못 하게 만들지!!!

이쯤에서 작은외삼촌이 부득불 우리라도 모셔야하지 않겠냐고
강하게 나왔어야 했는데 무슨 이유에선지 외숙모의 고집을 꺾지 못 했다.

그리하여 처음엔 시설이 괜찮은 요양원을 찾다가, 좋은 곳은 너무 비싸고
가격이 적당한 곳은 한없이 순서를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래저래 일단 적당한 가격의 요양원에 접수를 해놓고 통지를 기다리던 참에,
그 동안 외할머니 모시는 일로 벌어지는 꼴을 보다 못한 영광의 셋째 이모부님이
버젓하게 자식들이 살아있는데 어떻게 내 부모를 요양원에 보내냐며
자신이 모시겠다고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서신 것이다.

다른 딸들은 형편이 안 되서 애태우며 눈치만 보던 차에,
그럼 그렇게 하자면서 형제들이 생활비를 갹출해 영광 이모네로 보내드리고
형제들이 짬나는 대로 수시로 외할머님을 찾아뵙자는 쪽으로 결정이 났다.
그 때가 9월이었다.

9월 초에 영광 가실 때만 해도
시외할머니는 병세가 깊고 치매끼도 꽤나 있으셔서
어머님이 찾아뵈면, 딸을 보고도 “누구시요?” 하며 못 알아보시더란다.
아들에게 쫓겨나 정신까지 이상해진 외할머님을 뵙는 어머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을까?

그러던 게 11월 중순쯤 나와 곰돌이가 어머님을 모시고 영광에 찾아뵐 즈음엔
정신도 또록또록하시고 얼굴도 말끔하신 게 아프신 흔적이 전혀 없을 만큼 건강해 보이셨다.
그만큼 영광 이모님과 이모부님이 지극정성으로 모신 결과였으리라.

큰아들, 며느리도 안 찾아주는 마당에 외손주, 며느리가 찾아주니
외할머님은 그걸 얼마나 고맙게 여기시는지,
내 손을 부여잡고 그렇게 좋아하실 수가 없었다.
난 돌아가신 울 할머니를 뵙는 것 같아 가슴이 찡하게 울렸다.
우리 할머니도 나랑 곰돌이가 시골 가면 이렇게 좋아하셨는데...


노인들에겐 겨울이 가장 고비라고 한다.
이번 겨울을 잘 지내셔야 내년을 또 사실 텐데
외할머님 당신이나 다른 이모님들이나 다들 이렇게 정정할 때
좋은 모습으로 돌아가시는 게 복이라며 입을 모으셨다.
너무도 힘든 과정을 거쳐 오늘의 평안함에 이르렀기에
다시금 그 힘들 때를 겪는다는 게 서로들 끔찍했으리라......
외할머님이 부디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시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으면서도
그렇게 반어적으로 말해야 서로 속이 편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영광에 도착했던 날 밤, 작은 외삼촌도 광주에서 마침 내려오셔서
외할머님을 둘러싸고 딸 넷과 아들 하나가 모두 한 지붕아래 모여
자정이 넘도록 이야기꽃을 피우셨다.(큰외삼촌은 끝내 뵙지 못 했다)
난 피곤해서 중간에 잠자리에 들었다가
외삼촌이 광주로 다시 가실 무렵에 깨어 새벽 늦게 다시 잠자리에 들었는데,
새벽 2 시까지 그렇게 한담을 나누시는 소리를 들을 수가 있었다.
한없이 정겨워보였고 좋아 보였다. 밝게 웃는 이모님들에 비해,
작은외삼촌의 얼굴은 어딘가 어두워보였지만 말이다. 외삼촌도
전에 외할머님을 모시고 살 땐 표정도 밝고 농담도 잘 하시고 그랬다고 한다.
그런데 이제 자식의 도리를 못 하고 있으니 기가 죽은데다, 늘 죄송한 마음이
한 구석에 자리하고 있어 표정이 어두워지신 것 같았다.


요즘 버려지는 노인 문제로 세상이 들썩들썩하다. 부모 봉양 문제를 떠넘기다
결국 자살에 이르는 일까지 신문과 뉴스를 장식할 만큼 이런 류의 사건이 비일비재하다.
나는 인간된 도리로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그런 족속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내 자식이 아프면 부모는 무슨 짓을 해서라도 치료를 서두르고,
뇌사 상태에 있다해도 정신이 깨어날 때까지 옆에 들러붙어
극진한 간호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래서 의학적으론
설명할 수 없는 기적까지도 일으키는 사례가 심심치 않게 있다.

그런데 내 부모가 아프면 자식은 자신에게 부모가 쏟았던 정성의
십분의 일, 백분의 일도 쏟지 않고 어디다 내다버릴 궁리나 하고,
어서 돌아가셨으면 하고 대놓고 악을 쓰며 원망하고 있다니...
그런 사람들을 보면 난 가슴이 먹먹해지고 만다.
아무리 자식은 부모사랑을 못 따라간다지만,
이건 해도해도 너무한 게 아닌가????????

그 씁쓸한 세태가 정작 우리 시외가에서도 일어났었다는 사실에
심한 부끄러움을 느끼는 동시에, 티비와 신문에서나 봐온 그런 작태가
얼마나 광범위하게 우리 주위에 포진해 있는지 깨닫게 되기도 했다.

우리가 왜 이렇게 변해버렸을까?
내 자식 귀한 줄 아는 사람이 왜 자기 부모 귀한 줄 모르는 것일까?
그렇게 부모를 내다버리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자식사랑이 끔찍하다고 한다.
자신이 그렇게 부모를 내다버리면, 그것을 보고 자란 자식도
언젠가는 자신에게 그렇게 하리란 것을...
자신의 악행이 언젠가는 부메랑처럼 되돌아오리란 걸 왜 모르는 것일까?

정말이지 안타깝고 무서운 세상이다.
제발.... 우리 그렇게 살지 말자.


2001.12.16. 가슴이 답답해지는 일요일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