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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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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2


BY noma 2001-12-09


가현이가 편지를 잘 쓰는 것을 보면 아마도 자기 아빠의 영향인 듯 싶다.

솔직히 연애시절엔 카드나 쪽지정도 밖에 받진 못했지만 짧은 문장에도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재주가 있었다.

그리고 오히려 결혼 후에 자주 받게 된 편지는 이 사람한테 이런 면이 있었나 할 정도로 진지하고 깊은 애정을 느낄수 있는 글이었다.

기념일이나 혹은 싸우고 난 후에 살며시 놓고 간 편지를 읽다 보면 눈물도 나고 웃기기도 하고 아무튼 기쁜 일에나 슬픈 일들엔 남편의 편지가 한 몫 했던 것 같다.

가끔 사람을 감동시켜놓고 마지막에 '여보, 나 뭐 좀 사주면 안될까?' 하고 애교 섞인 요구만 없으면 좋았겠지만.

편지를 잘 쓰는 남편이 그 편지로 인해 한 번 곤욕을 치룬 적이 있다.

시댁으로 들어와 살면서 창고 정리 좀 하고 싶어 그렇게 해 달라고 했건만 차일피일 미루자 하루는 혼자 팔을 걷어 부쳤다.

가끔씩 서랍정리를 한답시고 늘 그 속에서 나온 내용물들의 추억속에 잠기는 버릇이 있는 내게 솔직히 정리란 어려웠지만 그래도 시도 해보기로 했다.

창고의 물건들을 이리저리 옮기던 중 남편의 학교때 성적표, 건강 기록부 등이 나올 때까진 그런대로 이 작업도 재밌었다.

남편의 글씨체가 담긴 편지 봉투가 여러 개 나오고 군사우편이 찍힌 봉투에 부모님 앞으로 돼 있는 그 편지를 열어본 순간 역시나 부모님을 생각하는 그 절절한 글들에 감격하고 있을 때 머릿속을 쿵하고 내리치는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어머니, ... ...를 며느리라 생각 하시구 잘 대해주세요...'
처음엔 웃음이 나왔다. 딱 걸렸어 하는 의기양양한 마음과 함께.

그런데 그 외에 시누나 시동생에게까지 당부하는 편지 몇 통을 더 읽고는 그런 웃음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정리고 뭐구 다 내 팽겨둔채 남편에게 전화해서 낭독을 시작하자 처음엔 코웃음을 치더니 나중엔 확 끊어 버리고 말았다.

솔직히 그녀의 얘긴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까지 마음에 둔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약간은 놀라기도 했고 재미로 남편에게 시비를 걸었지만 무슨 죽을죄를 진 것처럼 행동한 남편에게 솔직히 상처는 받았다.

혹시 진짜?

나중에 시누나 시동생은 전혀 그녀의 존재에 대해 기억조차 못하고, 남편도 갑작스러운 일에 제대로 설명을 못해 오해를 사긴 했지만 군대에 있는 동안 남자들의 절박한 어떤 심정으로 인해 그런 감정을 갖는다고 고백함으로써 편지사건은 마무리지었다.

그래도 한번 잡은 꼬투리를 결코 놓칠 수 없는 나에게 새로운 무기가 되어준 편지사건이 행운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남편의 추억을 지켜줘야 할지 아니면 전혀 없었던 일처럼 생각해야 될지도 정말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