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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397

남편과 술 한잔


BY dansaem 2001-11-19

우린 가끔 둘이서 술잔을 기울일 때가 있다.
아니, 요즘은 자주 한다.
신혼 때부터 그래 왔는데
나 역시 그 자리를 좋아한다.
술이라는 게 묘한 힘이 있어서
차를 앞에 두고는 나오지 못하는 이야기를 끄집어 낸다.
꼭 술이 취해서가 아니라
술잔을 마주한 그 분위기가 속내를 드러내기 쉽게 한다.

그렇게 분위기가 잡히면
그 동안 가슴에 담아두었던 이야기들을 털어 놓는다.
남편에 대한 불만과 서운했던 이야기들,
앞으로 이렇게 하면 좋겠다는 바람들을,
그리고 때로는 시집과의 갈등도 조용히 내놓는다.
그렇게 털어놓은 이야기는 뒤탈이 없다.
감정을 섞지도 않고 이성으로 걸러진 이야기만 하게 되므로.

몇주 전 일이다.
신랑이 술 한잔 하자길래 매실주 담아둔 걸로 술상을 봤다.

주거니 받거니 분위기가 좋았다.
잘 익은 매실주도 맛이 끝내줬다.
그래서 조금 더, 조금만 더 하면서 내온 게
대충 봐도 1200cc 정도는 마신 것 같다.
좀 무리를 하기는 했다.

신랑은 눈도, 얼굴도 빨개졌는데도
안 취했다고 우기면서 자꾸만 '한병 더'를 요구한다.
그러더니
결국 다음날 술병나서 한나절을 이불 속에서 나오질 않는 거다.

아침에 아이들만 식은 밥 데워서 대충 먹이고
큰 애 유치원에 데려다 준 후
나도 한잠 더 잘려니 웬걸!

둘째가 책읽어 달라고 칭얼칭얼,
막내는 배고프다고 응애응애,
또 다시 자리에 누우니 똥 쌌다고 응애응애...

그럭저럭 벌써 12시가 넘어선다. 점심준비를 하는데
세탁기를 돌리고 점심준비를 하는데
큰 아이 데리러 가야할 시간이다.

신랑도 마침 잠에서 깼길래 좀 갔다오랬더니
머리도 흔들려서 운전도 못 하네,
속도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이불 속에서 나오지도 않는 것이다.
괜히 어리광도 부리면서....

하지만 같이 마신 술에 자기만 취했나?
(솔직히 신랑이 좀 더 많이 마셨다.)

"그럼 내가 갔다올테니 당신이 밥 해 놓을래?"
"아니. 당신이 갔다와서 해."
끝가지 개긴다.

"그럼 난 가서 짜장면 사먹고 온다."
협박도 해 본다. 물론 안 통한다.

몇번을 꼬시고 얼르고 윽박질러도 꿈쩍도 않는다.
나 열받았다.
그래서 보란듯이 지갑들고 둘째 데리고 나갔다.

큰애는 학교에서 급식을 하는데도 짜장면 먹겠단다.
애들한테 물어봐서 집에 가자면 그냥 갈 생각이었는데
짜장면에 눈이 뒤집힌 녀석들은 아빠는 안중에도 없다.

"아빠 혼자 집에서 배고플텐데..."
슬쩍 떠보지만 아이들은 꿈쩍도 안한다.

못 이기는 척 중국집으로 갔다.
아이들은 짜장면 하나를 나눠주고
난 얼큰한 짬뽕으로 속을 달랜다.

계속 신랑이 맘에 걸린다.
"아빠가 삐지지 않을까? 엄마는 아빠가 쪼금 불쌍해 지는데, 어떡하지?
그러자 큰 아이 왈,
"엄마는 변덕쟁이야. 아까는 아빠 미워서 밥 안 준댔잖아?"
"......."

할 말 없음.

솔직히 별 맛도 없는 걸 대충 먹고 집에 왔다.
근데 아기는 콜콜 자고 있고 신랑이 없다.
둘러보니 사과 하나 깍아먹고 밭에 갔나보다.
맘에 걸린다.
집안을 대충 치우고 나서
사과와 당근을 갈아서 쥬스를 만든다.

녹즙기도 없이 갈아서 짜서 만든 쥬스는 많은 양을 하기가 어렵다.
역시나 얼마 안 되는 주스,
나는 맛도 안보고 아기에게 줄 것을 조금 남긴 후
신랑이 일하는 밭으로 가려했는데
마침 집에 뭔가를 가지러 왔다.

눈치를 살피니 삐치진 않았나 보다.
쥬스를 맛있게 먹는다.
속이 다 풀리고 시원하대나 어쨌대나 아부를 한다.
자기는 나름대로 내 눈치를 봤나 보다.

그런데 잠시 후
결국은 먹을 걸 다 꺼내서 다시 확인을 하고 만다.
에고, 아까운 주스.
난 먹고 싶은 것도 참고 자길 다 줬건만.


그 이후로도 우리의 술자리는 계속된다.



답글 주신 님들,
고맙습니다.
어제 이 방에 넋두리 하고 나니 속이 좀 풀리더군요.
게다가 님들의 위로에 힘을 얻습니다.

호수님, 올해 귤값이 많이 싸지요.
여기는 경상도 북부지방인데
제주도에서 배타고 여기까지 온 귤값이 그 정도니
산지에서는 많이 낮겠지요.
일년 내내 땀흘리신 결과가 있어야 할 텐데...
저희도 신랑이 농사를 좀 짓습니다.
김장 무를 심었는데 값이 영 없어서 난감하네요.
농사 짓는 사람들이 제대로 댓가를 얻을 수 있는 날이
빨리 와야 할 텐데요.

피오나님의 시 정말 재밌더군요.
전 그 주인공만큼은 아니지만
정말 당해본 사람만이 알지요.
님의 말씀대로 읽으면서 웃었더니 훨씬 즐거워졌답니다.
고맙습니다.

myung님의 답글 감사 드립니다.
님께서도 시골에 사시나요?
이 방에서 보면 시골에 사시는 분들을 뵙기가 어려워서요.
님 말씀처럼 제가 점점 큰 소리치게 되더군요.
그래도 신랑이 많이 이해해 준답니다.

행운이63님!
제가 오히려 님께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하는데
도리어 위로를 받는군요.
동생분의 명복을 마음으로나마 빌어봅니다.
젊은 나이신데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님께서도 건강 조심하시고 늘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