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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게슈타포


BY 이화 2001-11-05

내가 어릴 때 5공 때 없어진
TBC TV 에서 하던
'아내는 요술장이'라는
외국 드라마가 있었다.

아내는 하늘나라에서 온 요술장이이며
순진한 남편은 그 사실을 모른다는 설정하에
이들 부부 주변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가
가벼운 코메디 터치로 그려진 홈드라마였다.

요즈음 문득 드는 생각은
순진무구한 남편이 나로,
못하는 거 없는 요술장이이면서
겉으로는 안 그런척 하는 아내가
남편인 것처럼 자꾸 연상이 되는 것이다.

내가 이런 피해의식을 가지게 된 원인은
근본적으로 내가 컴맹인데 비해
남편은 전산 전공자인데다 회사에서
근무하는 부서도 전산실인데 있다.
그것은 낮에 집에서 내가 컴퓨터로
무슨 짓(?)을 하든 남편의 감시망을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 된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 나치스 치하의
비밀국가경찰 GESUTAPO 처럼 남편은
나의 행적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다.
퇴근해서 집에 오는 순간 컴퓨터부터 켜고
그때부터 낮에 내가 무엇을 했는지
미루어 유추하는 그의 검색작업이 시작된다.

일단 주부 사이트부터 전부 섭렵한다.
그리고 내가 쓴 글을 찾아내는 것이
그의 가장 큰 즐거움이다.
아니라고 우겨봤자 소용없는 일이다.
내가 쓰는 어투, 즐겨 표현하는 수사법,
문장에 흐르는 단호한 나의 성격등을
종합하면 나의 글을 찾아내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이란다.

그래서 모모 상담코너에서 상담자로
꽤 명성을 얻었던 나의 필명도
그 코너에서 사라지게 되었고 흘러흘러
이젠 아컴방에까지 도망을 오게 된 것이다.
이곳에서의 필명은 아직 모르는 상태지만
언제 들킬지 몰라 조마조마하다.

메일 박스며 아이디며 비번까지 모두 공개하고
서로가 깨끗하게 살자는 것이 그의 주장이지만
나도 나름대로 맺힌 것이 있고
쏟아내고 싶은 속내가 있는지라
100% 공개는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더구나 시집이며 남편에 대한 불만을
써놓은 것을 보면 자기가 아무리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라 한들 기분 좋을리 없고
따라서 나의 적당한 비밀주의는 어떻게 보면
자기에 대한 배려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인데
그렇게 매사에 다 알고 싶어하는지...

어제도 잠시 막간을 이용하여 다른 사이트에
아주 오랜만에 짧은 글을 올렸는데
어느새 그것을 찾아내서는
이것, 당신이 쓴거 맞지?
아주 눈앞에 들이대며 전리품이라도 얻은 양
호들갑을 떠는 것이 아닌가.

자기가 그럴수록 나는 더욱 숨기게 되고
쓰고 싶은 수많은 글도
포기하게 된다는 것을 모른다.
그러면서 말로는
나는 당신을 자랑스럽게 여겨...
이런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그렇게 해주면
내가 더 고마와 할텐데.

남편이 내가 쓴 글을 읽으면
나의 내면을 들키는 것 같아
많이 쑥스럽다.
아직은 혼자 간직하고 싶은 기억도 많고
가정사에 찌들어도 나에게도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
글을 쓰는 나만의 공간이 있음은
내 생활에 있어 오아시스와도 같은 것이다.

아컴방 마저 들키게 되면 어쩌나.
생각도 하기 싫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