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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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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 며느리의 효도


BY ns05030414 2001-11-04

"아버지, 아버지, 제삿상은 몇 시에 차리지요, 아버지?"
말을 시작할 때 마다 두 번 씩 부르는 호칭은 빠르게, 그 다음 이어지는 말은 느릿하게 며느리는 시아버지에게 묻는다.
끝에 한번 더 아버지를 붙이는 것도 잊지 않는다.
며느리가 자기 주장을 관철하고 싶을 때 자주 쓰는 수법이다.
하지만 시아버지는 그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그저 막내 딸 어리광 부리 듯 하는 며느리가 이쁠 뿐이다.
무뚝뚝한 시아버지는 이런 애교에는 익숙치 못해서 며느리 수법에 더 잘 넘어간다.

"옛날에는 자시에 지내는 것이라고 해서 밤 열 한 시가 넘어서 지냈지만, 요즈음은 다들 일찍 한다고 하니 열 시에 하기로 하자."
시아버지는 며느리을 생각해서 한 시간을 양보한다.
"아버지, 그 때까지 기다리면 배고픈데 저녁 식사는 어떻게 하구요?"
"여섯 시 쯤 저녁식사는 하고..."
시아버지의 대답은 역시 며느리의 예상대로다.
하긴 너무도 당연한 것을..., 묻는 게 멍청한 짓이지.
한데도 여우 며느리는 이렇게 멍청한 질문을 자주 한다.
마치 해결할 수 없는 난제에 부딪친 것 처럼...
시아버지의 명쾌한 대답이 며느리에게도 명쾌한 해답이 될 수는 없다.

"아버지, 그렇게 하면 제가 너무 지치고 힘들잖아요.
저는 그다지 튼튼한 사람이 못되는데 어떻게 해요?"
며느리는 이번에는 자기 힘에 버거운 일이 맡겨진 것을 처음 알았다는 듯이,
예전에는 전혀 이런 상황이 벌어질 것을 짐작조차 못 했었다는 듯이,
그리고 곤경에 빠진 자기 좀 도와 달라고 호소하듯이 말한다.
시아버지가 이런 곤경에서 구해 줄 것을 철썩 같이 믿는 사람처럼 천연덕스럽게 말한다.
물론 말짱 내숭이다.
한국 사회가 요구하는 맏 며느리 역할에 대해 너무 잘 알기에 하는 연극일 뿐이다.
며느리는 사회가 요구할지라도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은 할 맘이 없기에 하는 연극일 뿐이다.
이 번에는 아들이 나선다.
며느리에게 팔푼이 역할에 대해 잘 훈련 받은 아들이다.
"맞아요, 아버지! 우리 각시 힘들어서 병나면 어떻게 하라구요."

'어쩌다 내 아들이 저런 병신이 되었단 말인가?'
처음 큰 아들 내외 사는 것을 보고는 못 마땅할 때가 많았지만 이제는 습관이 되어서 그러려니 한다.
그래도 시아버지는 영 입맛이 쓰다.
그러나 어쩌랴... 대세는 이미 기울어 버린 것을...
며느리가 자기 체력이 미치지 않아서 못하겠다고 버티는데는 도리가 없다.
그렇다고 화를 낼 수도 없다.
체력이 딸린다고 하는데 화를 내면 시아버지만 나쁜 사람이 될테니까...
그리하여 제사는 저녁 식사 겸하여 여덟시에 지냈다.

이튿날이다.

나이가 들면 동기간의 정이 더 깊어지기 마련이다.
시아버지는 오랫만에 만난 여동생 내외들이 반가워서 그냥 헤어지기가 섭섭하다.
남산구경이라도 같이하고 싶다.
하지만 늙은 사람들 끼리 다니는 것 보다는 젊은 사람이 같이 다니면 보기도 좋고 편리도 하다.
많이 늙어서 젊은 사람이 필요할 나이들은 아니지만...

다른 아들네들은 다 돌아가고 큰 아들도 출근하고 젊은 사람이래야 집에 남은 것은 큰 며느리 뿐이다.
시고모가 큰 며느리에게 넌지시 말한다.
"어른들 모시고 구경 다니는 게 효도다..., 같이 갈래?"
이런 낚시밥을 덥썩 물 여우 며느리가 아니다.
속으로 혼자 대답한다.
'전 효도할 마음 같은 것은 전혀 없답니다'
그러나 겉으론 그저 배시시 웃을 뿐이다.
잠시 뜸을 드린 다음 느릿한 목소리로 웃음을 머금고 대답한다.
"그냥 어른들 끼리 다녀오세요."

모두들 나가고 난 빈 집에서 며느리는 쇼파에 벌렁 눕는다.
그리고 마음 놓고 혼자서 중얼거린다.
"내가 미쳤냐?...
이 자유를 효도하고 바꾸게?..."
그리고 며느리는 안다.
효도할 맘이 없는 자신이 누구보다 더욱 시어머니, 시아버지에게 상냥하게 대할 수 있다는 것을...
그 것이 효도할 맘이 없음에 대한 보상심리이든, 효도의 부담에서 벗어난 마음의 자유에서 오는 여유든 그 것은 아무래도 좋다.
자신과 가정에 웃음과 평안을 가져다 주는 것이라면...
여우 며느리는 안다.
자신이 착함이나 선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인 것을...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기대가 적으면 실망도 적다고 했든가?
다른 사람이 악한 마음을 드러낼 때 여우 며느리는 화 내는 대신 그저 씩 웃는다.
"나 보다 한 수 아래구나! 그런 것을 들키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