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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를 피해 호랑이 굴로 들어 간 시아버지.


BY ns05030414 2001-11-03

"그래도 대추, 밤이 없는 제사가 어디 있소?"
"아, 제사가 아니라 추모 예배라고 해도..., 그 양반 참 말귀를 못 알아들으시네..."
시어머니와 시아버지는 제사인지, 추모 예배인지 모르지만 아뭏든 상에 오를 음식 종류를 놓고 말씨름을 하고 있었다.
나이가 들면서 시아버지의 주권은 서서히 침해를 당하더니 드디어 시어머니가 제사 문제에 까지 상관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제사에 관한 것은 예전에는 누구도 왈가왈부할 수 없는 시아버지의 고유 권한이었지만 이제는 사정이 다르다.
여자도 칠십이 되면 발언권이 생기는 것일까?
아니면 명예 가장으로 은퇴한 남자대신 실질적인 가장이 되는 것일까?

큰 아들 내외가 미국에서 돌아왔다.
시아버지는 이제 제사를 그 들에게 맡기기로 하였다.
시어머니의 관절염이 심해진 까닭도 있었지만 그 보다는 제사 때 마다 시어머니와 다투는 일을 피해 보자는 마음이 더 컸다.
다툴 때 마다 시아버지는 시어머니에게 조금씩 양보해야 했던 것이다.
시아버지에겐 그래도 며느리가 시어머니보다는 만만해 보였다.

큰 아들 내외는 시아버지의 믿는 도끼였다.
다른 자식들은 모두 시어머니를 따라 예수쟁이가 되었지만 그 들은 종교가 없었다.
다른 자식은 아무래도 좋았다.
제사를 맡을 것은 큰 아들일테니까...
그러나 옛말 그른 것이 없다던가?
결국 그 들은 시아버지의 발등을 찍었다.
미국에 있을 동안 예수쟁이가 된 것이다.

시아버지에겐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었다.
그래도 제사는 큰 아들에게 맡길 수 밖에...

"너희들 어머니가 몸도 불편하고 하니 앞으로 제사는 너희가 알아서 하도록 해라."
시아버지의 말이 떨어지자 마자
"네, 그럴께요. 아버지.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들이 알아서 할께요."
냉큼 대답하고 나선 것은 큰 아들이 아니라 큰 며느리였다.
시아버지는 여기서 눈치를 챘어야 했다.
세대차이를...
큰 아들은 가정에서 시아버지 만큼의 권한도 가지고 있지 못함을...
큰 며느리도 호랑이가 되어가고 있음을...

제삿날이 되었다.
큰 며느리는 도무지 준비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시어머니는 며칠 전 부터 이 것, 저 것 사 나르고 분주하게 준비를 했던 것이다.
보다 못한 시아버지가 나섰다.
"아침 일찍 시장 다녀 오너라. 부천의 셋째도 와서 거들라고 하고..."
큰 며느리 느릿느릿 대답했다.
"아버지, 오늘은 일요일이예요. 교회에 다녀 오는 길에 시장에 들려서 장보기 하려고 생각하고 있어요."
아무런 준비도 해 놓은 것이 없음을 뻔히 아는 시아버지는 복장이 터진다.
"도대체 제사를 어떻게 하려고..."
시아버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큰 며느리가 말을 자른다.
"아버지, 저희들 보고 알아서 하라고 하셨으면 저희들에게 맡겨 두세요. 알아서 할께요."
며느리와 말씨름을 할 수도 없어서 시아버지는 입을 닫는다.

큰 아들 내외는 교회 다녀 오는 길에 하나로 마켓에 들러 바리바리 사 들고 들어왔다.
셋째 며느리를 불러 함께 하라는 시아버지의 말에 큰 며느리는 대답했다.
"이씨 집 제사에 왜 며느리가 수고해야 해요? 서방님이면 모르지만...
집에서 노는 사람도 아닌데요.
저는 우리 집에서 하기로 한 것이고, 살림만 하니 하지만...
셋째는 그냥 두세요.
일요일이나 하루 쉬게요.
아범하고 둘이서 하면 충분히 할 수 있어요.
다른 사람들은 제사 지낼 시간에나 오라고 하지요.
바쁠 때 그 식구들 점심 차려 주려면 일을 못해요."
큰 며느리 입은 이럴 땐 따발총이다.
평소엔 느릿느릿한데...
시아버지는 할 말을 잃는다.

참 망신스럽기도 하다.
큰 아들은 하루종일 부엌에서 큰 며느리 심부름을 하였다.
무엇이 그리 좋은지 둘이서 낄낄 웃어가며 음식을 장만한다.
시아버지는 후회막급이다.
이런 망신스런 꼴을 볼 줄 알았으면 큰 아들 보고 제사를 맡으라고 할 일이 아니었는데...
얼마나 큰 며느리에게 훈련을 받았는 지 큰 아들 부엌일 돕는 것에 선수가 다 되었다.
시아버지는 속으로 혀를 끌끌 찬다.
'정말 말세다, 말세...
사내녀석이 부엌에서 계집 심부름꾼 노릇을 하다니...'

이렇게 해서 제사는 시아버지가 그리던 그림과 전혀 다른 것이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