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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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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보다 잘 통하는 귓속말


BY ns05030414 2001-10-29

네 살, 다섯 살, 두 아이 손을 잡고 미국 가는 비행기를 탔다.
남편을 찾아 가는 길이다.
남편은 한 해 먼저 가 있었다.
막상 비행기를 타니 여편은 형편 없는 영어 실력이 은근히 캥겼다.
미국도 벙어리도 살고 귀먹어리도 살겠지, 하면서 큰 소리 쳤지만 그 것은 비행기 타기 전 까지의 일이었다.
엄마의 마음이 이심전심으로 느껴진 것일까?
쉴새 없이 조잘거리던 아이들도 조용했다.
얼굴에 염려의 빛이 보이기도 했다.

중 학교 첫 영어 시간 부터 여편은 영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상한 혀 꼬부라진 소리를 입에 올리는 것이 영 내키지 않았다.
고등 학교에 간 여편은 영어 시험에 시험지는 필요 없고 답안지만 있으면 되었다.
시험지는 보아도 도통 알 수 없는 것들이니 볼 필요 조차 없었다.
대학에선 컨닝으로 해결이 되었다.
말이 안 되는 소리 같지만 여편이 학교 다니 던 때는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일도 가능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그 지긋지긋한 영어에서 해방된 줄 알았다.
이렇게 끈질기게 따라 붙어 괴롭힐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알았으면 중 학교 때 부터 고분고분 영어 공부를 할 것을...

고난은 비행기 안에서 부터 시작되었다.
커다란 흑인 남자가 말을 걸어 온 것이다.
여편이 도통 알아 들을 수 없는 영어로...
여편은 얼굴이 붉어졌다.
영어 한 마디 못 하면서 무슨 뱃짱으로 아이를 둘 씩이나 데리고 미국가는 비행기를 탔느냐고 남들이 흉보는 것 같아 무척 창피했다.
눈치를 보니 그 흑인 남자는 아이하고 놀고 싶어서 허락을 구하는 것 같다.
말은 못하고 얼굴만 빨개져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아이들 앞에서 이 무슨 망신이람...
엄마의 부끄러운 모습을 아이들에게 보여줄 수 밖에 없는 것이 더욱 창피했다.
그리고 속으로 열 번도 더 자신을 책망했다.
"으이그, 이 바보야!
진즉에 영어 공부 좀 해 두지."

그 흑인 남자는 아이들에게 뭐라고 뭐라고 하더니 아들을 번쩍 안아 들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아마 숫기있어 뵈는 사내녀석이 놀이 상대로 적당하다고 판단한 듯 했다.
그렇게 다섯 살 짜리 아들은 그 흑인 남자 자리에 가서 한참을 놀았다.
그 남자가 스튜어디스에게 얻어 주는 과자도 먹고, 둘이 깔깔거리고 웃기도 하는 것이 여편이 앉은 자리에서도 보였다.
아들녀석은 번죽도 좋다.
영어 한 마디 못 하기는 마찬가진데 어떻게 의사소통을 하는 지 잘도 놀고 있었다.
실컨 놀았는 지 흑인 남자는 아이를 도로 데려다 주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아들의 얼굴을 보니 신이 나 있었다.
처음 비행기를 탔을 때, 조용하고 염려의 기색까지 보이던 그 얼굴이 아니었다.
평소의 천진난만하고 쾌활하던 아이로 돌아 가 있었다.
아이는 평소의 수다스러움을 회복하고 있었다.
여전히 엄마의 얼굴이 근심스러워 보였을까?
아이는 엄마를 위로하였다.
"엄마, 염려하지마!
영어 못해도 괜찮아!
영어 못하면 귓속말로 하면 돼!
내가 아까 그 아저씨에게 귓속말로 했더니 그 아저씨가 알아 듣고 막 웃었어.
귓속말은 다 통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