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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이 다녀 간 날.


BY 雪里 2001-10-26

마당끝에 비켜서서 서 있는 은행나무의 색깔을 보며
친구들은 탄성을 질렀다.
거의 매일 지켜보는 내가 보아도 신비스럽기만 한데
아파트살이를 하는 눈으로 보는 시골풍경이 주는 경이로움은
환상적일 수도 있겠지.

가을엔 언제나 우리집에서 모이기로 되어 있는 친구들이 왔다.

감채를 들고 감나무에 매달려서 소리들을 질러댄다.
생각만큼 작은자루에 감이 들어가지 않는지
한개따고 두개 떨어 뜨리고,
떨어진것이 아깝다고 주워서 먹고...
나이를 잊고 떠들며 웃는 소리가 점심준비를 하고 있는 나를
들뜨게한다.

여고시절의 웃음들이 다시나와 엉클어져서,
파란 하늘에 구름되어 떠다니고,
뒷산의 나무들이 막바지 폼새를 자랑하느라
한껏 멋들어진 색깔로 치장을 해대고 있는데,
깨스불 줄여 놓고 나와 선 나는,
그 모습 그대로 눈이 부셔 눈물이 나려 한다.

이맘때쯤 우리는,
허리 잘록한 하얀 춘추복을 입고
교정의 벤취에 앉아 낙엽을 주워 시집의 갈피에 꽂고 있었는데...
추억속의 친구들과 내가 미래로 온것 같다.

점심먹고, 커피를 한잔씩 하고.
농사지은 땅콩을 쪄서 내놓고,
말린 곶감도 냉동실에서 꺼내놓고.
시골스런 먹거리들이 식탁위에서 내 생활 얘기를 대신해 주고 있다.

풀속에 들어 앉은 고구마밭을 보고 농사일을 해본 한친구가
캘 시기가 늦었다고 한다.
호미를 챙겨서 각자 고구마밭둑을 타고 앉는다.
작년에도 심긴 했지만 한번도 캐는일을 해보지 못한 내가
신기해서 조금 거드니까 걱정들을 하며 말린다.
허리 더 아파지면 그이한테 혼난다면서...

진한빨간색의 고구마가 둑에 잔뜩 나와서 늘어선다.
밤고구마가 맞지싶다.
봄에 모종파는 아주머니가 심어보고 맛있으면 내년에도 그자리로 오라고 신신 당부 하셨었는데
내년봄에도 그아주머니에게 모종을 사야겠다.
색깔만 봐도 정말 맛있는 밤고구마가 틀림없으니까.

고구마를 다캐고 상자와 자루에 담아
뒷정리까지 해 놓고 친구들은
하루가 다 지나고 있음에 집에갈 걱정들을 한다.
서울까지 평택까지...

무거워서 안가져 간다는 고구마를 몇개씩 싸고
땅콩도 조금싸고 냉동실의 곶감도 싸며
친정 다녀가는 딸을 챙기는 엄마처럼 흉내내어 본다.

내년에는 조금 힘들어도 차를 가지고 오라며
무거워서 더 많이 못보내는걸 아쉬워하고 있지만
우리의 나이가 무거운것을 두려워 하고 있음인듯 싶어
씁쓸한 웃음을 만들어 그네들에게 보여 준다.

"내년 가을에도 또와!"
친구들을 보내는 마음 한쪽이 허전하다.
하루쯤 묵어 가면 밤새 얘기하고 놀다 갈수 있지 싶은데
아직은 엄마란 자리들을 비우기엔 이른 것 같아,
편안한 가정을 잘 꾸리는 친구들이 그냥 고맙다.

이렇게 멀리까지 날 보러 와주는 친구들이 있어
행복해 하는 나는,
겉은 늙으면서도,
만년 소녀이고 싶어진다.

특히,
오늘 같은 날에는.

雪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