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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아버지의 기억


BY 구남매의 다섯째딸 2001-10-26

독자로 자라신 아버지는 외로워서 인지 자식을 많이도 낳으셨다
그것도 결혼한지 10년 만에 줄줄이 생겼다고 한다
시골살림이 다 그렇듯 우리집 살림도 넉넉하지가 않았다
아버지가 수산업 하신다고 전답을 하나씩 하나씩 팔아 넘긴게
겨우 논 네마지기와 산비탈에 모래밭이 고작이였다
아침이면 도시락을 네개 다섯개 싸야했던 엄마는 밑으로 보리밥을 깔고
위로 살짝 쌀밥을 얹는 식으로 우리의 자존심을 살려 주셨다
그 어려운 살림에도 한번도 냄새나는 김치를 싸 본적이 없어 지금도
엄마에 노고에 감사드린다
섬에는 초등학교가 다섯개 중학교가 하나 있었고 고등학교에 가려면
광주나 목포에 유학을 가야할 지경이여서 너무도 힘들게 공부를 해야 했다
그때 내 위에 언니가 목포에서 고등학교를 다닐때의 이야기를 할까 한다
평소에 아버지는 무섭고 다정한 맛이라곤 전혀 없는 분이셨다
아버지랑 겸상을 하고나면 다들 다리가 저려서 일어 나지 못할 지경이였고
배가 고파도 더 먹고싶어도 더 먹을 수도 없었다
많이 먹으면 공부 못한다고 야단이시고 안 먹으면 뭐 먹엇냐고 야단이셨다
동네에선 아주 지체높으신 어른이시고 동네 이장을 10년 넘게 해온 터라
면에 가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인물로 인정을 받으셨다
그러다 술이나 한잔 하시면 동생들과 나를 무릎에 앉으시곤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시고 공부도 가르쳐 주시는 자상함도 보였다
어느날인가 목포에서 학교에 다니던 언니가 왔다
납부금때문에 온 것 같았다
우리는 부모님에 눈과 언니에 목소리만 들어도 알수 있었다
언니는 다시 해가져서 돌아갈때까지 아무런 말도 꺼내지도 못하고
막배를 타러 나갈때 아버지께서 언니에 손에 무언가를 건네 주셨다
그때 마당에 주저 앉아 울고 있던 언니를 잊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그런 언니를 끌어 안으며 미안하다 더 주지 못해
미안하다 라고 만 하셨다
언니는 아버지가 주신 반지 석돈을 꼭 쥔채 울며 가야 했다
서울언니가 공장에서 일해 모은돈으로 아버지 생신때 해 주었던
의미있는 반지였다 무척이나 좋아하셨던,
만지작 거리던 아버지를 기억한다
그걸 아는 언니라 더 더욱 눈물이 난 모양이다
아버지에 반지 까지 팔아서 공부를 해야만 할까! 하는 생각과
아버지에 따뜻한 마음을 더 잊을 수가 없었나 보다
나의 어린 눈망울에서도 눈물이 글썽 거렸다
무섭기만 하던 아버지가 생전처음으로 가깝게 느껴 졌던 때 였다
그런뒤 내가 중1이 되었을때 아버지는 암으로 세상을 떠나시고 말았다
이제 생각해 보면 너무도 그립고 대단한 아버지가 너무도 존경스럽다
나도 아버지처럼 좋은 부모가 되고 싶어요
벌써 17년전 이야기 인데도 생생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