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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호스 아줌마의 신문읽기 34 - 나를 바꾼 知의 순간 - 강우방 前 경주 박물관장 편


BY 닭호스 2001-01-20

나를 바꾼 知의 순간 - 강우방

어릴 때부터 나는 모든 것을 스스로 선택했다. 독문학과에 입학한 것도, 그리고 들어가자마자 첫 강의실에 등을 돌리고 먼 암자에 칩거한 것도. 인정해 주지도 않았지만 스스로 의무를 부과하여 미학 강좌 40학점을 획득하고, 생명을 걸고 유화와 붓글씨에 몰두한 것도. 고유섭을 읽고 니체를 탐독한 것도.

시행착오와 방황 끝에 미술사학이란 학문을 선택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내 기억에 없다. 다만 봄 날, 온갖 조건이 갖추어진 때에 매화가 피고 산수유 몽오리가 터지듯 그렇게 미술사학에의 꿈이 피어났다. 예술과 학문이 융합된 인문학의 한 독특한 분야인 미술사학을 인문학 가운데 가장 근본적이고 가장 선도적인 분야로 확립하려는 것이 나의 꿈이었다.

사물(삼라만상, 혹은 예술품이나 자연)을 ‘보고’ ‘기술하며’ ‘해석한다’는 것―. 미술사학의 섬세한 연구 과정이야말로 예술·문학·사상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것이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나라 학자들의 지식이나 눈에만 의존해서는 안되고, 우리 미술품에서 내 스스로의 힘으로 진리와 방법을 발견하고 내 목소리로 얘기해야 했다. 그리고 나에게 아름다음과 진리는 하나였다.

그런 힘을 길러주어 나를 일으키게 했던 기회가 있었다. 35세. 일본 쿄토(경도) 국립박물관에서 1년간 연구하는 동안, 과감히 책을 덮고, 흑백 필름과 슬라이드용 카메라 두 대, 삼각대, 백열등 두 개, 노트 등을 꾸려 메고 일본 전국에 있는 중국 불상의 조사에 나섰다. 하루 종일 한 손으로 조명하고, 눈으로 사물의 초점을 맞추고, 다른 한 손으로 셧터 누르고, 관찰한 걸 기록하고, ... 그렇게 고행하기를 10개월 쯤 됐을 즈음, 한·일 문화교류 협정에 따라 ‘한국미술 5천년전’이 마침 쿄토 국립박물관에서부터 순회하기 시작했다. 그 때 유물 해포에 참여하면서 처음으로 포장을 풀며 우연히 손에 쥔 것이 우리나라 최고의 불상인 고구려 연가칠년명 금동여래입상이었다.

나는 그 순간의 희열에 찬 마음의 내밀 상태를 도저히 글로 표현할 수 없다. 개안의 확인이었다. 처음으로 “그 불상이 내 눈에 보였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수백 점의 불상 작품들을 찍는 동안 비교의 능력이 길러진 것이라고 나 자신을 믿게 되었다. 그 이래 ‘체험의 미술사’를 제창하며, 지금까지 직접 조사하고 사진 찍으며 예술 작품(혹은 진리)의 세계에 들어가서 매일 글을 쓰며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그러나, “적은 새여 바람에 흔들리는 약한 가지에서 잠자는 적은 새여”라는 만해의 노래 끝 구절이 마음 한 구석에서 늘 울리고 있다.


( 이화여대 교수·미술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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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전 달이가 잠든 오전께 가족들과 함께 미국에 계신 사촌 형님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조카가 설화를 가진 한국의 유물에 대해서 연극발표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박물관에다가 문의를 해 볼수 없느냐는 내용이었다..

그 전화를 받고서 문득 내가 불과 몇년전 미술사 공부에 대한 청운의 꿈을 안고 잠시나마 박물관밥을 먹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내었다.


내가 대학을 나오고...
이리저리 취직자리를 알아보았지만.. 그것은 자꾸만 뜻하지않은 방향으로 나아가 삼류대학 비인기학과의 꼬리표에 대한 확실한 각인만을 내게 심어주고 있던 때의 일이다.

나의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불면의 밤을 보내기를 여러날..

우리 대학 박물관의 관장이시자 사학과 교수셨던 아빠의 친구분께서 내게 미술사를 공부해보지 않겠느냐고 조심스레 물어오셨다.. 아빠는 그 길이 내게 합당한 길이라 여기셨고, 그 후 나는 지방의 한 국립박물관에서 공부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

물론 유급직 직원도 아니었을 뿐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치는 심했으며...
남 모르는 어려움이 많았다.

그리고 몇달후 나는 유물 전산화 작업에 참여하면서 어깨너머로 인류학이나 고고학 전공자들이 사용하는 언어들을 줏어 듣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박물관 지하에 있는 수장고에서 막노동이나 다름없던 유물정리작업을 하면서..나는 틈틈이 학교에 가서 회화과 학생들을 위해 열린 강의인 한국 미술사 수업을 경청했었다...

제대로 된 것은 아닐지라도 회화사나 도자사 등등의 미술사에 대한 나름대로의 어떤 정의를 세우고 기초를 닦아나가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나는 박물관에서의 기간제 근무가 끝나는 가을, 보다 구체적인 공부를 위해 일본으로의 유학을 계획하였다. 그러던 어느 봄날 예기치 않게 찾아온 남편이라는 운명을 맞아 나는 결혼을 하였고, 아이를 낳아 애엄마가 되었다..

엄마와 아빠는 내가 미술사학도로의 길을 가려했을 때보다 더 큰 확신을 가지고 나의 결혼을 추진하였으며..지금도 늘상
"그 때 시집가기를 잘했지.. 니가 뭐 대단하게 되기나 했겠냐?"
하는 말씀을 하신다...

나의 몇권 안되는 책들이 꽃힌 작은 방에 아이를 재우면서 책꽃이에 있는 책들을 쓸어보았다..

한국회화사.
한국의 불상..
아름다운 우리 도자기..
고고학 이야기..
등등...

몇 안되는 책들이지만.. 기쁜 맘으로 그리고 아쉬운 마음으로 한 두권씩 사 모았던 미술사 관련 책들에는 내가 그것들을 잊고 산 세월만큼의 먼지들이 쌓여 있었다.

잊고 있었던 나의 꿈으로의 회상의 시간이었던 것이 반갑다...

언젠가 돌아갈지도 모르고... 영원히 추억으로만 남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살아온 세월이 그닥 길지않은 세월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삶의 구비구비에 내가 갈구하고 열망했던 그 무언가가 있었다는 사실이 반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