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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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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은 무슨 양반이 그렇게 욕을 잘 하신대요?


BY ns05030414 2001-10-17

설날 아침이다.
차례를 지내고 이 방, 저 방 흩어져 있던 아들네들을 시아버지가 호출하였다.
시부모가 자랑스러워 하는 아들 넷이 여기 저기서 모여 들었다.
설겆이가 끝난 참이라 며느리들도 자리를 함께 하였다.
"너희들이 이렇게 모이는 것도 쉽지 않고..., 사람이 자기 조상이 누군 지도 모르고 살아서는 안 되는 법이고...,"
시아버지는 이렇게 말을 시작하였다.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소리다.
친정 할아버지에게서, 아버지에게서......
족보에 관한 말을 하려는 것이 분명하다.
딸은 오를 수 없다는 그 족보 말이다.
어린 시절 그 잘 난 족보 때문에 동갑 내기 사촌 오빠에게 서러움을 많이 당 해야 했다.
내가 그 보다 못 한 것이 하나도 없었건만, 그저 족보 이야기만 들고 나오면 당해낼 수가 없었다.
"족보에도 오르지 못할 것이 잘 나면 뭐해?"
그래서 나는 족보 이야기 하는 남자들을 싫어한다.
하지만 오늘은 내 위치가 천방 지축 망나니 처럼 날 뛰던 울 아버지 막내 딸이 아님을 안다.
나는 이 집의 맏 며느리다.

조용히 앉아 시아버지 설명을 들었다.
우리는 성주 이씨이고, 시조는 누구고, 중 시조는 누구고, 우리는 누구의 몇 대 손이고, 누구는 우리의 몇 대 조 할아버지이고....등등.
이야기를 듣다 보니 슬슬 무언가 불편해지기 시작한다.
"나는 그 사람들과 무슨 관계가 있지?"
"옛날 조상이 벼슬하고 양반이었던 것이 왜 중요한 것이지?"
"......
머릿 속에 의문 부호들이 꼬리를 문다.
의문이 생기면 참을 성이 없어지는 나는 기어코 시아버지의 말 허리를 자른다.
"그런데, 아버지, 어느 역사학 교수가 그러는 데 자기 오 대 조 안의 조상 중에 벼슬한 사람이 없으면 양반이라고 할 수가 없다던데요. 조선 말기에 족보를 사고 파는 일이 하도 많이 일어나서 누가 양반이었고, 상민이었는 지, 알 수 없게 되었다고 하면서요."
'요런 버르장머리 없는 것'하고 생각하였겠지만 시아버지 참고 말 한다.
"족보 여기를 보면 이렇게 조상들 함자가......"
버릇 없는 맏 며느리 또 시아버지 말 허리를 자른다.
"요즘에 양반에 줄 못 대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다 들 족보있는 양반이라고 주장하지요. 옛날에는 상민이 양반의 두 배도 더 되었다는 데 그 많던 상민의 자손은 다 어디 갔대요?"
시아버지는 족보를 손 가락으로 짚어 가면서 양반임을 설명하느라 다시 애를 쓰신다.
끝으로 이제 족보들은 모두 큰 아들 집인 우리 집으로 옮겨다 두시겠다고 하신다.
남편은 못 들은 체 한다.
남편 옆 구리를 쿡 찔러 주의를 환기 시킨다.
"여보, 아버지가 족보를 우리 집에 가져다 두신다고 하는데..."
남편은 간단히 대답한다.
"그럼 없어지는 거지, 뭐."
시아버지는 못 들은 척 하신다.
못 된 맏 며느리 그만 했으면 좋으련만 기어코 한 마디 덧 붙인다.
"아버지, 그런데요, 무슨 양반이 텔레비젼 볼 때 그렇게 욕을 잘 하신대요?"
내가 어렸을 적 사촌에게 받은 상처만 아니었으면, 시아버지의 양반 타령에 귀 먹은 척 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시어머니 무시하는 시아버지 닮은 남편이 옛날에 날 쬐끔만 덜 무시했어도, 정말 쬐끔만 덜 무시했어도, 이 말 만은 안 했을 지 모른다.
어지간히 뻔뻔한 나도 이 말을 하고선 뒤가 캥긴다.
"난 모르겠다, 부엌에나 가 봐야지."
슬그머니 일어나서 부엌으로 간다.
동서들이 쪼르르 내 뒤를 따른다.
"형님, 그 말 잘 하셨어요. 우리 그이도 얼마나 욕을 잘 하는 지 몰라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닥 잘 한 것 같지는 않지만 그닥 잘못한 것도 아닌 모양이다.
이 후로 시아버지 텔레비젼 보면서 욕하는 것 못 들었으니까.

참고; 어린아이(초보며늘)들은 흉내 내지 마세여.
이렇게 되기 까지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법이랍니다.
남편을 먼저 길 들여야 하는 것은 필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