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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을 닦으며


BY 말그미 2001-10-16

< 방을 닦으며 >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온 집안을 뒤집어놓고 청소를 하는데
오늘이 바로 그 날이다.

결혼할 때 남동생이 사준 청소기로 먼저 밀고 난 담에
처음 이 집에 가져올 땐 수건이었다가 지금은 걸레로 전락한
선명도 떨어지는 파란색 수건을 물에 적셔 방을 닦는다.
그리 넓지 않은 집이기에 걸레 하나면,
안방 작은방 거실까지 한 번에 해결이다.
집이 좁아서 좋은 건 청소할 때 뿐이다.
아참, 겨울에 난방비 적게 나올 때랑.^^;;

안방을 뽀드득 소리가 나게 닦다보니,
장판 겹치는 부분이 눈에 들어온다.
할머닌 이런 데도 꼭 닦으라고 하셨지.
집안을 제대로 가꿀 줄 아는 여자는
누가 안 보는 데도 다 깨끗하게 한다면서.

할머니는 무척이나 깔끔하신 분이었다.
똑같은 속옷 빨래도 할머니가 하시면 훨씬 하얀 빛이 났다.
고등학교 때, 잠시 고모집을 나와 동생이랑 자취를
했던 적이 있었는데, 손주들을 찾아오신 할머니께선
부탁하지도 않은 빨래를 해놓곤 하셨다.
학교를 마치고 자취방에 돌아와 보면
빨랫줄에 걸린 속옷들에서 나는
새하얗다 못해 푸른 빛이 도는 형광빛!!!
그걸 보며 감탄을 연발하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내게 처음으로 밥상 곳곳을 행주로 깨끗이 닦는 법을
알려주신 분도 할머니셨다.
남은 생각지도 못할 밥상 아랫부분이나 상다리 틈새까지
할머니는 깨끗이 해야 한다며 가르쳐주셨다.
엄마가 사주신 은행나무 밥상을 꺼내 밥을 차리고
다시 접어 넣을 때마다 곳곳에 먼지가 낀 걸 볼 때면
이미 돌아가셨지만 할머니께 죄송스럽다.--;;

내게 된장국 끓이는 방법을
처음으로 가르쳐 주신 분도 할머니셨다.
쌀 씻을 때 쌀뜨물을 미리 받아놨다가,
된장은 얼마큼 가져다 넣고(그 때 반드시 미리 된장을
풀어놓으면 안 된다고 하셨다. 그럼 떫은 맛이 난다고)
고추는 손으로 똑똑 분질러 넣고
마늘은 딱 요만큼 넣으면 된다고 세세히 알려주셨다.
그렇게 해서 초등학교 3학년 때던가?
처음으로 내가 끓인 된장국을 내놓던 날,
일 마치고 피곤한 몸으로 들어온 아홉 식구들이
머리를 맞대고 먹으며 잘 끓였다며 칭찬하던 게 엊그저께 같다.
지금은 벼라별 재료를 넣고 끓여도 그 된장국 맛이 안 난다.--;;


누가 들쳐보지도 않을 장판 밑을 닦고
속옷 빨래를 누구보다 희게 하고,
밥상을 안 보이는 데까지 깨끗이 닦고,
된장국을 누구보다 맛있게 끓이는 일은
인생에서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런 거 평생 안해본 사람도
누군가는 오히려 남보다 호강하며 잘 살고,
누군가는 그렇게 평생을 하고 살아도
생전 가난을 면치 못할런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오늘 방을 닦으며 생각했던 것은
그런 보이지 않는 곳에 스며든 마음이
드러나지 않는 곳까지 생각하는 마음이
요즘엔 찾기가 힘들다는 사실이었다.


할머니께서 가르쳐주신 그 마음을
나 역시 잊어버리고 사는 것처럼
바쁘다, 바빠를 외치는 많은 사람들이 잃어가는 건
바로 그런 마음이 아닐까?


2001. 10.16. 잔뜩 흐린 가을날에 할머니를 생각하며.

Secret Garden Adag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