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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나무와 이별이 있는 풍경


BY allbaro 2001-10-16

은행나무와 이별이 있는 풍경

그래서 그게 그렇게 된거야. 음 불쌍해요. 나도 그 친구가 많
이 가엾다고 생각해. 나는 그 친구의 연주가 정말 맘에 들었
었어. 재능이 없거나, 재산이 있거나 하면 그런일은 없겠지.
어쩐지 자신의 길목을 막고 있는, 치울 수 없는 바위를 밀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이야기였어. 사람이 거지로 돌변하는 것
은 마음 한번 잘못 먹기에 다름이 아니야. 누군가에게 애걸하
거나, 속을 들킬 정도로 자신을 가난하게 만들면 그게 거지
지. 그러니까 어쩌면 억대 거지들도 수두룩 할 지도 몰라.

저기 우유차가 있네요. 그래 우리 우유를 사마시도록 하자.
제가 살께요. 음 한 개에 750원, 어! 마트에서는 1,000원인
데... 이야 별걸 다 기억하는 것을 보니, 너의 경제적 능력이
상당히 향상되었군. 네. 요즘 통 제대로된 삶을 살구 있질 못
해요. 돈과 무관한 일상을 누리고 싶어하는, 삶과 진실에 대
한 열의로 가득한 아우가 거스름돈을 챙기며 말했다.

우리는 스스로를 거지로 만들지 말도록 하지요. 당연하지. 주
머니에 돈이 없는 거지라면 어쩔 수 없지. 하지만 마음속에서
부터 거지가 되는 일은, 그리고 진심으로 동정을 사는 일은
없도록 하자구. 우리는 진짜 알거지가 될 수 있는 다양한 가
능성에 대하여 골목길이 끝날 때까지 이야기하였다. 차가 기
다리고 있었고, 이 은행나무의 행성에서, 머나먼 길이 오늘
하루 앞에 놓여 있었다.

그때 황금 빛의 은행나무 아래로 멋진 뒷모습의 여인이 걷고
있었다. 깎아 낸듯한 종아리가 타이트한 스커트 자락 아래에
서 규칙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신호를 받은 차는 천천히 움
직이고 있었고, 눈은 그 아름다운 뒷모습을 따라가고 있었다.
그리고 차가 그 여인을 스쳐지날 때, 시간이 일순 멈추었다.
차는 속도를 늦추었고, 잠시 그렇게 머뭇거리다가 다시 천천
히 속도를 높였다. 당신이었다. 은행나무 아래를 천천히 걷고
있는 그녀는 바로 당신이었다. 결별을 선언한지 몇 개월이 지
났고, 아직 당신은 그길을 걷고 있었다. 차창으로 거리의 풍
경이 스르르 지나치고 있었고, 당신은 백 미러 속을 걷고 있
었다. 마음속에 요란한 물소리가 울렸다.

다시 거리의 풍경이 속도를 늦추었다. 우측 방향등을 켜고 차
를 길가에 멈추었다. 당신은 이제 오른쪽 사이드 미러 위를
걷고 있었다. 차문을 열고 가을의 거리에 섰다. 호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찾았다. 라이터를 켜자, 담배가 호흡을 시작하
였다.

바람이 불고 있었다. 연기가 길게 달아나고 있었다. 20미터쯤
밖에서 당신은 잠시 멈추었다. 5초쯤 우리는 진공의 거리에
멈추어, 영원만큼이나, 분명히 영원만큼이나, 오랫만의 해후
를 하였다. 그리고 결심이라도 한 듯, 당신은 또각 거리는 걸
음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다시 5미터, 3미터, 마침내 2미터.
우리가 절대로 더 이상 다가서지 못할 그 거리였다. 당신은
멈추었고, 그때 시간도 함께 멈추었다. 당신은 보이는 것보다
아주 멀리에 있었다.

잘 지냈어? 당신은 대답 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아주 잠깐이
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깔고 발 밑을 바라보고 있었다. 돌려
주고 싶은데... 뭘요? 사진들과 그리고 당신이 준 반지. 이제
내겐 너무 큰 부담이 되어 버렸어. 그러지 않으셨으면 해요.
돌려 받고 싶진 않아요. 그냥 마음대로 하세요. 그래 그러면
그렇게 하도록 하지. 내 마음대로... 다시 바람이 불었다. 당
신의 어깨가, 내 어깨와 30센티미터의 간격으로 스쳐 지나고
있었다. 타인의 어깨였다. Goldenrod의 은행 잎이, 우리 두
사람의 사이에 비현실적인 노란색 점들을 박아 넣었다. 우리
는 쇠라가 그린 풍경화가 되어 버렸다. 아마 은행나무와 이별
이 있는 풍경 따위의 제목이라면 적당할 것이었다.

다음날 새벽, 나는 한때 우리의 따듯한 공간이었던, 그곳의
현관에 서 있었다. 차가운 대기였고, Midnight Blue의 밤이었
다. 나는 흰 봉투 하나를 들고 있었다. 술은 마시지 않았다.
술을 마시면 감정을 절대로 조절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우체
통을 열고 편지와, 사진과, 반지, 그리고 남은 사랑을 쓸어
담은 흰 봉투를 넣었다. 그리고 먼 훗날, 그날 아침 당신이
많이 울었노라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마치 넋이 나가 버린
듯한 창백한 흐느낌이었노라는 이야기였다. 그래? 그랬었나?
다시 당신을 울게 만들었나? 그 이야긴 그만하지... 나는 전
해들은 이야기를 전하는, 오랜만에 만난 당신의 동창을 제지
했다. 자 그냥 마시자구. 웬지 아무런 맛도 느낄 수 없었다.
마른 낙엽의 향이 나는 물속에 가라앉은 채, 마시는 듯한 술
이었다.

서울을 빠져나가기란, 결코 서울에 들어오기보다 쉬운 것이
아니었다. 길은 자동차의 행렬이 되어 있었고, 핸들을 잡은
아우의 얼굴은 붉어졌다. 나는 길막히는 것이 너무 싫어요.
좋아! 어느 버튼을 누르면 날개가 나오지? 날아 가자구. 싱거
운 소리에, 작은 미소를 내려 놓는 아우의 옆얼굴을 보다가
새로운 테이프를 발견하였다. Sting? 호오 제법인걸? 가끔씩
기특하단 말이야. 테이프를 삼킨 오디오에서는 메마른 음성으
로 It's probably me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내가 가장 좋아
하는 곡의 list에 있는 노래였다. 단순하고 반복되고, 그리고
가을이고. 시간과 사랑으로 한 입 크게 베어먹힌 삶이고...
그러니까 지나치게 적당한 곡이었다.

길은 느리게 끊임없이 뒤로 흘러가고 있었다. 은행나무 잎의
노란색은 잔뜩 드리운 낮은 회색의 하늘속에 유난하였다. 길
가의 공원 약수터에 물통을 놓고, 물을 긷는 베이지색 스포츠
캡의 계집아이 둘을 보았다. 긴 생머리를 스포츠 캡의 뒤로
늘이고, Medium Wood색 귀여운 반코트를 입었다. 아마 자매인
가보다. 물통 입구로의 짧은 여정에서 물줄기는 아침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두 계집아이는 삶의 입구에서 반짝이고 있었
다. 노란색의 은행나무 아래에서, 거침없이 튀어 오르는 맑은
웃음소리가 번져 나왔다. 흑백영화에서 두 자매만 칼라 처리
한, Dim Grey의 하늘과 멋진 대비를 보여준 스틸사진 같은 장
면이었다.

잠시 짧은 터널을 지났다. 부랴부랴 담배불을 끄고 창문을 모
조리, 파도가 밀려나간 후의 바위에 붙은 따개비의 두껑처럼
완고하게 닫았다. 쓸모 없는 짓이라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터널속의 공기란 그다지 달가운 것이 아니었다. 이내 터널이
끝났다. 다시 은행나무의 장엄한 노란 행진이 시작되었다. 신
호가 바뀌고 작은 횡단보도 앞에서 차는 잠시 출렁거렸다. 버
스 정류장의 동그란 표지판이 차창과 5미터쯤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Dim Grey의 하늘을 닮은 머리카락과 굳은 표정의 노파
한분이 서 계셨다. 화석처럼 굳어진 창백한 얼굴. 굽어진 어
깨. 그리고 다시 은행나무. 노란 잎 하나가 노파의 어깨 위로
굴렀다. 어쩐지 터널 입구쪽의 시간과 터널 출구쪽의 시간은
온도가 다른 것 같았다. 마치 일생이라는 시간의 터널을 통과
한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어디쯤의 검은 암흑을
지나고 있는 것일까? 형님 오늘은 한숨이 많이 길어요. 제가
듣기에 조금 불편하네요. 무슨일이 있나요? 아니 그런 것은
없어. 내게 문제 따위는 없어. 신경쓰이게 해서 미안해...


세 그루의 소나무 아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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