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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모르고 살아서


BY 칵테일 2001-01-17


이촌동에서 태어나 초년기를 보낸 이후, 초등학교 무렵
부터는 시흥에서 오랫동안 살았다.

같은 시흥에서 한차례 이사를 가기도 했었지만, 그 이사
라는 것도 내 나이 스물이 넘어 한 것이니 맨 처음에
살았던 곳이 나에게는 시흥에서의 대부분 추억인 셈이다.

시흥.
지금은 서울의 어느 곳이 다 그러하듯, 지속적인 개발로
인하여 예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의 도시다.

하지만 내가 보낸 어린 시절의 시흥은 지금의 시흥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나는 탑동초등학교를 나왔는데, 그 학교 주변에는 맑은
개울이 흐르고 있었다.

더운 여름 날에는 거기에서 첨벙첨벙 발을 담그고 친구
들과 놀았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지금은 완전히 복개되어 거기에 개울이 흘렀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이 더 많다.

내가 시흥에서 살았던 추억중에 가장 기억나는 것이
있다면 아마도 [산]에 대한 것이 아닐까 싶다.

시흥은 관악산을 비롯하여 어느 사방을 둘러봐도 산을 볼
수 있는 그런 곳이었다.

물론 야트막한 산도 쉽게 찾아갈 수 있는 길이 여러군데
나 있었고, 대단한 등산이 아니어도 어린 아이들조차 쉽게
놀이삼아 찾아갈 수 있는 곳이 많았다.

하지만 우리 어릴 때만 해도 산으로 나들이 삼아 놀러가는
문화보다는, 산에 흔전만전한 물에 빨래하러 가는 아줌마들
모습을 더 많이 볼 수 있었다.

커다란 고무 대야에 하나 가득 빨랫거리를 담고, 또아리를
얹은 머리 위에 얹어 산으로 빨래하러 가는 아줌마들.

물론 혼자가는 것은 아니었고, 몇몇 아줌마들이 떼로 모여
반 나들이삼아 가는 것이기도 했다.

거기에는 물론 어린 아이들을 함께 데려가기도 했는데,
나도 그 아줌마들 아이들과 함께 묻어 몇번 따라가본 적이
있었다.

물론 그 아줌마들이 산으로 빨래를 하러가는 이유는 다른
게 없었다.

집에 변변한 수도 시설이 없이 사는 사람 입장에서는, 돈
한푼 내지 않고 쓸 수 있는 산 물에 빨래하러 가는 것이
경제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우리집은 산으로 빨래를 하러 가야 할 상황은 아니어서,
우리 새어머니께서 산으로 가셨던 적은 없었지만, 내 친구
들의 대부분이 어려운 집 아이들이어서, 나는 그들을 따라
산에 가곤 했던 것이다.

아버지는 내가 산에 따라간다고 하면 몸 다치고 위험하다고
극구 말리셨지만, 그래도 친구따라 산에 가는 것이 나에겐
그저 신나는 일이었다.

그래서 거의 달아나다시피 친구들과 아줌마들을 따라 산에
가곤 했었는데......

아줌마들은 동네에서 산까지 꽤 먼 거리인데도 불구하고,
그 무거운 빨래 대야를 이고 잘도 산을 오르셨다.

물론 높은 산은 아니고, 야산이었다.
거기엔 장택상[張澤相]씨의 별장이 있는 곳이어서, 그 어느
곳보다 수려한 경치와 다니기 좋게 길이 나 있어 마치 들길
걷는 것 같은 그런 곳이기는 했다.

산에 가면 적당한 곳에 삼삼오오 터를 잡아 빨래판과 빨래
방망이를 이용하여 삶는 빨래를 먼저 빤다.

그렇게 하다보면 한나절이 후딱가고, 한쪽에서 솥을 걸어
빨래를 삶으면서 모여앉아 요기를 하게 된다.

무슨 대단한 반찬이 있는 점심이 아니라 된장, 고추장으로
범벅한 막장같은 장에 상추나 찐 호박잎같은 쌈.

때로는 김치와 몇가지 나물을 한데 넣어 양푼에 비벼서
따로 나눌 것도 없이 그저 숟가락 하나씩 쿡쿡 찔러 먹는
비빔밥.

그 당시 매운 걸 잘 먹지 못했던 나로서는 참 먹기 힘든
메뉴(?)였지만, 그래도 시장이 반찬이라, 객적게 따라다니
며 놀았던 허기에 아뭇 소리없이 받아먹곤 했었다.

하지만 무슨 기억이며, 또 어떤 질긴 느낌에서일까.
아주 가끔씩 그렇게 어릴 때 먹어봤던 신통치도 않고
거칠기만 했던 그 음식들이 떠오르는 것은 왜 일까.

그렇게 허수룩한 점심 요기가 끝나면 아줌마들은 다시
빨래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날이 좋을 땐 커다란 바위에 널어서 물기를 말리기도
해가며, 쉬임없이 일하고 또 일했던 아줌마들.
아니, 내 친구들의 어머니들.

따라간 우리들도 빨래를 도와준답시고, 부피가 작은 양말
이나, 애들 속옷 따위를 바위에 대고 비누질해 비비기도
했었다.

엉성하긴 해도 그래도 하는 시늉한다고, 아줌마들이 그런
우리들 모습보고 박장대소하실 땐, 뭐가 뭔지도 모르면서
그냥 좋았었다.

소꿉놀이, 인형놀이.... 이런 것이 새삼 필요하지도 않을
만큼, 살림의 한 역할을 맡으며 사는 친구들이 그때는
너무도 많았다.

특히나 형제가 많은 집의 아이들은, 자기 동생을 거의 키우
다시피 하며 같이 커가는 아이들이 적지 않았으니까.

그렇지만 그 누구하나도 그걸 불평하거나 짜증내는 일은
없었다.
그때는 그저 다 그렇게 사는 것이려니했다.

왜냐하면 어느 집을 둘러봐도 다 그런 비슷비슷한 모습으로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요즘은 많은 집들이 딸이면 공주, 아들이면 다 왕자인
분위기로 아이들을 키우지만, 내 어린 시절만 해도 거의
반머슴삼아 자란 아이들이 더 많았던 것 같다.

불과 몇년도 되지 않은 사이에, 물론 경제적으로 눈부신
발전을 한 탓에 그런 변화가 오기도 했겠지만, 우선은 예전
보다 아이가 적어져서 그런 것은 아닐까 싶다.

우리 때는 팔구남매집도 흔했고, 칠공주니 오공주니..
하는 딸부잣집도 무척이나 많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아들을 선호하는 것은 그다지 변하지
않았지만, 먹고 살기도 빠듯한 시절에 팔구남매를 키운
다는 것이 지금 생각하면 너무 고생아니었나 싶다.

요즘 날씨 탓에 수도꼭지가 얼어 물이 안나오는 바람에,
세탁기를 전혀 쓸 수 없게 되니, 그 어린 시절 머리에
빨래이고 산으로 빨래가시던 아줌마들이 갑자기 떠오르네.

그렇게 힘들게 살기도 한 시절이 있었건만, 한 시절 훌쩍
지나 편한 게 몸에 배고 보니, 조금의 불편에도 왜 이리
모든 것이 힘들고 불편하게만 느껴지는 지 모르겠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몸 편해지면 마음부터 약해진다더니
그것이 이유이런가.


칵테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