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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게 늙어가는 방법 44


BY 녹차향기 2001-01-16

"조용한 실내에 이렇게 불편을 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
신사,숙녀 여러분! 오늘 제가 좋은 물건을 하나 가지고 나왔습니다.
이 물건은 용산전자 상가에 나가면 만오천원에 파는 물건인데,
바로 휴대용 라디오입니다.
에프엠 전용라디오로써 음질이 굉장히 깨끗하고, 싸이즈도 아주 작아서 아무데나 이렇게 꽂아놓기에 좋습니다.
등산, 낚시, 야외활동 어디에서나 사용하기 편리하시고, 음악, 날씨, 교통정보를 수시로 들을 수 있습니다.
밖에 나가시면 만오천원에 파는 이 물건을 이 자리에선 천원짜리 다섯장으로 여러분께 모시겠습니다.
한 번 들어보시라고, 다소 시끄러우시겠지만 조금 틀어놓겠습니다.
(휴대폰 스피커에 연결하자 금새 즐거운 음악이 흘러나오고)
아! 예! 금방 드리겠습니다..."

지하철을 타게 되면 혹간 만나게 되는 잡상인(?)을 오늘 목격했어요.
추운 날씨인데도 코트는 커녕 까만 색 니트를 걸쳐입은 그 상인은
50대쯤으로 짐작되는 여자분!!!이었어요.
고운 화장에 깔끔한 외모에 피부는 또 얼마나 미끈한 지 도저히 지하철에서 그런 물건을 팔리라곤 짐작도 할 수 없는 미인이신 아줌마께서 물건을 팔고 계셨어요.
당연히 모든 이들의 시선은 그쪽으로 집중되었고요.

"엄마, 저거 참 좋겠다. 되게 쬐끄맣다.."
동행이던 아들녀석은 그 물건이 무척 탐났던 가 봐요.
사줄까 생각을 한 번 해 보았지만 낚시나 등산을 자주 가지 않는 우리로선 굳이 그 물건이 필요할 경우가 없을 것 같았구요.
얼마나 씩씩하고 용감해 보이시는 지, 그리고 또 한편 얼마나 장해보이는 지 전 마음 속으로 그 분께 갈채를 보내드렸지요.

물건은 무척 잘 팔렸어요.
제 앞에 앉아계시던 신사분이 두 분, 뒷쪽에 계시던 젊은 처녀와 다른 남자분이 하나, 그리고 여기저기서 지폐를 꺼내들고 그 아줌마를 불렀어요.
"예. 감사합니다."
잔돈을 교환해 주면서는
"라디오도 받으시고, 돈도 받으시고 좋으시겠네요.."
하며 농담도 하셨지요.
밝은 웃음과 함께.

저게 만약 저런 기회가 온다면 저 아줌마처럼 밝은 웃음을 띄며 씩씩하게 물건을 이 칸에서 저 칸으로 옮기고, 지하철 직원의 따가운 눈총을 이겨가며 물건을 팔 수 있었을까 하고 생각하며 그 아줌마를 쳐다보았어요.
잠깐 혹은 며칠동안 하는 일이라면 몰라도 몇 주 혹은 몇 달간
저렇게 고된 노동에, 얼굴에 몇 장의 철판을 깔고 누구의 시선에도
떳떳하게 물건을 팔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비롯하는 것일까?

엄마이며 아내이기 이전에 한 여자로서 고고한 자존심은 어떻게 던져버릴 수 있었을까?
얼마나 깔끔하고 세련되어 보였는 지 평범한 가정주부의 모습과는 또 다른 분위기가 묻어났어요.
그런 씩씩하고 당당한 아줌마들이 많은 이상 우리나라는 굳세게 이 어려운 경제난국을 헤쳐나가리라 믿어요.
텔레비젼에선 불법대출건으로 청문회를 연다, 증인요청을 한다 떠들썩 하지만은 자기가 있는 자리에서 꿋꿋하게 삶을 엮어나가는 사람들이 있어서 얼마나 든든해요.

그 물건을 팔아드리지 못해 정말 못내 서운했어요.
손에는 십여만원쯤의 돈이 금방 모이더라구여.
많은 물건을 팔고는 총총히 다음 칸으로 무거운 박스를 번쩍 들여 옮겨가는 뒷모습을 한참 쳐다보았어요.
눈부신 저녁햇살이 그 아줌마를 한참이나 지켜주었어요.

추위땜시 우리집 세탁기 호스도 꽁꽁 얼어서 뜨거운 물로 녹여주었고, 길가에서 몇 번이나 넘어질 뻔 했었지만, 그 아줌마의 용기있는 삶이 우리 모두에게 열심히 살고 최선을 다 하라고 훈훈한 난로로 가슴속에 들어오네요.

아자,아자!!!
모두들 힘내시고 추위가 이제 막바지에 이르렀다고 하니 조금만 더 참고 이겨내기로 해요.
수돗물 얼지않게 단속 잘 하시고, 이불 꼬옥 잘 덮고 주무세요.

평안하고 따뜻한 밤이 되시길 바라며.
모두 안녕히 주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