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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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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며느리 정 붙이기..


BY 지란지교 2001-01-16

신혼여행을 마치고 시댁에 도착해 하루밤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온 다음 날...
시골에 계신 시어머니께선 보따리를 싸들고 신혼집으로 오셨다..
서울역으로 마중나간 큰 시누이 남편은 어머니 길 안내를 잘 못한다고
시어머니께 얼마나 역정을 듣고 오셨는지 들어오시지도 않고
그냥 가셨다.
그렇게 어머니는 갑자기 예고도 없이 오셨다.

딱 세번 뵈었나보다. 그때까지 시어머니를..
양측 부모님 상견례때, 그리고 세째 시아주버님이 병원에 입원하셨을때, 결혼식장에서...
나이차 많은 시아버님과 결혼해서 예전에 우리네 농촌살림이 다 그렇듯 어머니 고생또한 만만치 않으셨으리라.
남편이 고2때 아버님이 돌아가시고..머리큰 자식들 가르치시느라
허리한번 제대로 필 날이 없으셨으리라..
막내인 남편조차 어머니께 응석한번 제대로 부리지 못하고 컸다고 한다.. 항상 무섭고 냉정하기만 하셨던 모양이다.

슬하에 4남 2녀를 두신 어머니는 아들욕심이 유달리 많아 두 아들을
먼저 두시고도 큰 시누님을 낳으셨을때 딸이라 어찌 서운하던지
다시 기회를 주어 아들이라고 하면 금방 뒤돌아 낳고 싶으셨다고 얘길하셨다. 세상 천지에 당신 아들들 같은 아들은 없다는 생각으로
똘똘 뭉쳐서 어느 집 딸이건 마음에 안 들어 하셨다.

그렇게 갑자기 예정에 없던 어머님과의 생활이 시작됐다.
3년정도의 연애기간동안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별로 없었고
나또한 시골에 계신 외할머니만을 상상했던것 같다.
외할머니처럼 포근하고 살뜰하게 대해주시리라는...
당시 남편은 승진고시때문에 항상 늦었기 때문에 어머니와 주로 생활을 하게되었다.
어머니의 사투리는 거의 알아들을 수 없어서 통역이 없이는 불가능(?)할 정도였고 어머니 또한 말귀를 못알아듣는 막내 며느리때문에
무척 답답해 하셨다.
남편은 고등학교부터는 서울의 형님집에서 공부를 해서 그런지
사투리를 거의 안 썼는데, 어머니의 통역노릇은 아주 잘하였다.

순 서울내기에 친정엄마 아빠의 그늘에서만 자라다 덜컥 결혼한다고
그이를 집으로 데려오던날..친정 아버지의 섭섭한 얼굴을 잊을 수 없다. 항상 네 신랑감은 아빠가 골라줄테니 얌전히 공부만 열심히
하라고 틈틈이 말씀하셨는데, 아빠 몰래 연애를 3년이나 하고
것도 없는 집 막내에다 시댁도 먼 시골( 전남 담양) 이라고 하니
배신감 비슷한 기분이셨나 보다.
이리 저리 날 설득하고..이모나 사촌언니들까지 가세해서 달래다가
결국 포기하고 승낙하시기 까진 참 힘든 시간들이었다.

시어머니가 와 계신걸 아신 친정부모님들의 걱정또한 얼마나 크셨을까?
살림이라고는 전혀 모르고, 그야말로 요리책을 펴놓고 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밥상한번 차려내지 못하는 며느리와. 그런 딸 자식을
둔 친정엄마의 밑반찬, 김치등을 해나르기는 계속되었다.
시어머니는 성격상 며느리가 있는 부엌에는 얼씬도 안하셨고
조리방법을 물어도 사투리가 심하게 들어있어 알아들을 수가 없고...
식탁을 두고도 굳이 밥상에서 드시기를 고집하셨다.
밥상을 들어주는 남편에게도 곱지않은 말을 하시기 일쑤였고,
그때마다 잘 받아치는 남편을 보는것도 재미있는 일이었다.
아들 앞으로만 들이미는 반찬들을 보면서 친정부모님을 떠올리기도
하고...

낮이면 어머님의 지난 시절 얘기를 듣고 또 듣고..
두번이상 하셔도 처음들은것 처럼 들어드리고...
어머니와의 생활을 손녀와 할머니의 나이차처럼 공감대가 없었지만
어쨋든 어머니를 그나마 알 수있는 시간들이었던것 같다.
별일 아닌 일에도 갑자기 역정을 내시곤 했는데..
그럴때 마다 시골로 내려가시겠다고 하시며 혼자 푸념도 하셨다.
그러길 두어달쯤 겪다보니..허니문 베이비까지 들어선 상태라
신경도 예민해지고 그때까지 자유로운 친구들을 보자니 내 자신이
영 초라한것 같아서 미칠것 같았다..
솔직하고 명랑한 성격이던 내가 하루에도 수없이 감정의 기복을
겪으시는 어머니의 비위를 맞추자니 저녁이면 녹초가 될 것같았고
서툴기만 한 집안일이 왜 그렇게 하기 싫던지...

하루는 어머니가 고추장을 만들어 주신다고 큰 솥이 없는 관계로
커다란 스탠그릇에 죽을 쑤시다가...센 가스불을 조절하시지 못해서
밑바닥을 다 태워버려 탄내나는 고추장을 만드셨다.
막내며느리에게 솜씨자랑을 하고 싶으셨을텐데 조리도구도 마땅치 않고 불까지 마음대로 조절이 안되니 그 역정이 고스란이 내게로 떨어졌다. '어째 큰 솥이 없다냐..!! 평생 느그 두식구만 살줄 아느냐!!'
그날 어머니는 화가 나서 저녁도 마다하시고 누워계셨다.
그러다 보니 왠지 어색하기도 하고 왜 어머니하고 자꾸 뭔가 안맞을까
생각해보니 내가 너무 어머니께 예의를 차리고 잘해드리려고만
해서 도리어 어머니께서 불편해 하시는 것 같았다..

그래서 당장에 내 성격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우리 외할머니라고 생각하자...그렇게...
그리곤 어머니가 역정내시면 '어머니는 괜히 그러셔요..별일도 아닌데..' 하고 웃어 버리자 첨엔 당황해하시던 어머니께서도 '넌 왜 야단을 쳐도 들어먹지를 않냐..?'하고 웃으셨다.
그땐 전설의 고향이라고 티브이에서 꼭 소복입은 귀신이 나오는 걸
보여주었는데 어머니는 열렬한 시청자셨다.
난 드라큐라나 도깨비 이런건 안 무서워도 소복귀신은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무서워 했는데 그때마다 채널싸움도 많이 했다.
아뭏튼 내가 다가서자 어머니도 곧 편하게 대해주셔서 어머니가
앉아서 이런 저런 얘기 하시면 난 그 옆에 누워서 듣다가 잠들기도
하곤 했다.

그렇게 1년쯤 지내자 어머니께서 시골로 내려가신다고 하셨다.
막내며느리 정 붙이신다고 올라오셔서 근 1년을 같이 지내시다
내려가시는 거였는데...막상 가신다고 하니 좋기도 했지만
서운하기도 했다.
어머니께서는 '저건 꼭 00이 같아야..(시골의 큰손녀딸, 어머니가
농사일로 바쁘신 형님대신 키워주시다시피 하심) 00이도 뒤 끝이
없고 심통도 잘부리는데 저것도 똑 같아야..'하시며 나를 말하셨다.
명절에 시댁엘 내려가면
'제수씨, 엄니 성격 맞추기 힘들었을 텐디 어찌 일년이나 견디셨소?'
'엄니가 어디 가서 일년이나 계신곳은 막내제수씨 집 뿐이오'
하시며 아주버님들이 대견해 하셨다.

서울로 가끔 올라오시면,
딸 둘이나 아주버님댁 보다는 우리집에 오래 머무르시다가 가시곤
하셨다. 우리집이 젤 편하시다고 하시며 2~3달씩 계셨는데
그때마다 시댁손님치루기도 다반사였다.
가끔 남편에게 투정도 부리기도 했는데, 지금 남편이 숙달된
조교(?)처럼 살림을 잘 도와주는 것도 그때 다 훈련된 덕분인것
같다.

어머님나름대로의 며느리 정붙이기는 일단 성공한 듯 싶다.
지금은 하늘에 계신 어머니지만 지금도 시댁엘 가면
안방에서 나오시며 '오매, 이렇게 먼길 어찌 왔다냐...일루 오니라'
하시며 손을 꼭 잡아 아랫목으로 밀어넣어주실것 같다.
그리고,
다 하는 얘기지만 살아계실때 좀 더 잘할걸 하는 후회도 하곤 한다.
절실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