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첫사랑이라든지, 이성으로 인해
가슴 설레였던 추억이 없다.
여고 시절 하나쯤 가지고 있을 법한
선생님을 향한 연모의 정도 없었고
뭐...그렇다.
그를 안 것은 내 나이 스물 하나, 대학생일 때였다.
키가 작아 볼품은 없었지만 왠지 그에게 끌렸다.
학교 앞 비탈길을 천천히 걸어올라오는 그를
처음 보는 순간 내 가슴은 그냥 쿵...해 버렸으니까.
평범한 사람이었다.
선한 눈매가 좋았고 무엇보다
그의 과묵함이 좋았다.
가끔 커피를 한잔 마시고 말없이 거리를 걷다가
헤여지고, 그것이 전부였다. 그는 언제나 두손을
주머니에 넣고 걸었고 우리 집이 가까워질 무렵이면
가라...한마디 하곤 왔던 길로 사라져갔다.
그런 사소함이 좋았다.
그 시절은 과외도 금지되고 정치도 험악하던 시절이라
아르바이트 구하기가 참 어려웠었다. 나는 엄마의
목숨 건 반대로 아르바이트는 말도 못 꺼낸채 편하게
학교만 다녔지만 그는 방학이면 아르바이트로
얼굴 보기가 힘들었다.
그는 아는 사람이 많은지 일자리도 잘 구했다.
흔히 하는 말로 노가다-이것이 그가 늘상 하는 일이었다.
공중전화 박스 심는 일을 하거나 공장에서 폐기물
치우는 일, 가구 배달, 이런 일을 하였다.
집안이 넉넉하지 않구나...그렇게 생각했었다.
좋을 것도, 싸우는 것도 없이, 그렇다고 아주 모르는
사람도 아닌 그런 사이로 지내는데 그가 어느 날
군대가겠다고 남말 하듯이 얘기를 꺼내는 것이었다.
운전을 배워서 운전병으로 가겠다며 그는 곧
운전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이상한 말을
한마디 하였다.
아버지가 이리저리 손을 쓰는 모양인데
난 그런거 정말 싫다 친구들이 그걸 알면 나보고
썩은 놈이라고 할거야 최전방으로 가서 고생하다 올거다...
소원대로 그는 최전방으로 갔다.
그리고 가끔 편지를 주고 받았다. 애틋한 그리움은 아니었지만
그가 있음으로 항시 가슴이 따뜻하였고 혼자가 아니라는,
그런 든든함이 나를 지켜주었는데...
제대를 몇개월 남겨두었을 즈음, 휴가나온 그가 연락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다 귀대 날짜를 이 삼일 남겨둔
어느 날 밤 거나하게 술이 취한 음성으로 전화를 걸어왔다.
술잔 부딪히는 소리와
여자들이 웃는 소리, 뭔가
끈끈하게 느껴지는 이상한 분위기...
어...나 술 마셔...끊는다....
다음날 그가 이런 말을 했다.
친구들하고 색시집에 갔다
나는 그런데가 편하더라
왜? 내가 그런데 갔다니까 기분 나쁘냐?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이사람이 왜 이러지?
내가 가끔 그에게 보낸 편지를 휴가 때마다 집에 가져와
책상에 넣어두었는데 그의 어머니가 그걸 봤단다.
그리고 겉봉의 주소로 우리집 뒷조사를 했단다.
머리속이 하얗게 비는 것 같았다.
그의 어머니가? 왜? 왜 그런 짓을?
무엇때문에?
하지만 그의 한마디로 나의 마음은 이미 결정을 내리고 있었다.
그도 그것을 알기에 그토록 괴로워했음을 바보같이 나는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왜 이리 눈치가 없을까...
헤어지는 것은 참으로 어려웠다.
비 오는 날 혼자 술을 마시다가 집에 오면
골목앞에 그가 서 있었다. 달려가 손을 맞잡고 우린
꺼이꺼이 울었다.
다신 만나지 말자 해놓고도 그렇게 하질 못했다.
그가 제대하고도 한동안 그렇게 만났지만 헤여질때의
다짐은 절대 전화하지 말자...그래 놓고도 다음번에
연락이 오면 또 만나고,헤여질 때는 언제나 눈물바다였다.
그는 장남이었고 그의 집은 나름대로는 상류층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그런 집이었다. 나는 오로지
자식들을 위해 열심히 살아온 엄마를 봐서라도
층이지는 결혼을 하여 평생 엄마를 죄인으로 만들며
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의 엄마가 한 행동은 나의 가장 예민한 부분,
내 자존심의 결정체, 나의 아킬레스건, 건드려서는 안될
부분을 건드린 것이었고 그런 뒷조사를 한 사람이면......
마지막으로 만나던 날, 서로 손을 부여잡고 다음 생에선
꼭 부부로 만나자고 눈물바람을 일으키고 우린 헤여졌다.
그리고 14년 뒤 그가 전화를 걸어왔다.
남편을 만나 제법 친해졌을 때 나에게 진지하게
던진 질문이 있었다. 당신이 나를 좋아한 이유를
모르겠다고...자기보다 훨씬 나은 사람을 만날 수
있었을텐데 자기를 택한 이유가 무엇이냐고.
나의 대답은 이러했다.
당신이 가난해서 좋았다...
그래서 마음이 놓였다...
그를 생각하면 아직 마음이 아프다.
이루지 못한 사랑은 다 아름답다 하더라도
그래도 마음 한켠이 아리다.
이젠 아픔이 아닌 추억으로 그를 기억하련다.
영원한 비밀
양 주동
임은 내게 황금으로 장식한 작은 상자와
상아로 만든 열쇠를 주시면서
언제든지 그의 얼굴이 그리웁거든
가장 갑갑한 때에 열어 보라 말씀하시다.
날마다 날마다 나는 임이 그리울 때마다
황금상(黃金箱)을 가슴에 안고 그 위에 입 맞추었으나
보다 더 갑갑할 때가 후일에 있을까 하여
마침내 열어보지 않았노라.
그러나 어찌 알았으랴! 먼, 먼 후일에
내가 참으로 황금상을 열고 싶었을 때엔,
아아! 그때엔 이미 상아의 열쇠를 잃었을 것을.
(황금상 - 그는 우리 임께서
날 버리고 가실 때 최후에 주신
영원의 영원의 비밀이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