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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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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


BY my꽃뜨락 2001-09-29



사회적으로 그럴듯한 지위나 명예를 전혀 갖지 못하고
살아온 탓에 명절 무렵 문턱이 닳게 바리바리 선물꾸
러미가 들어 오는 이웃들을 부럽게 바라 본 적이 많
았었다.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큼만...이라는 속담처럼 뇌
물이 아닌 선물이 집안을 ?아 든다면 추석명절을 맞
이하는 마음이 얼마나 든든하고 풍요로울까.

생전에 그런 풍요로움이 내 팔자에 있으려나싶었는데,
몇 년 전부터 심심치 않게 정성이 담긴 선물들을 받게
되는 기적같은 일이 내게도 일어났다.

우리 나이가 나이니만큼 주변 지인들에게 나눔을 베풀
만큼 집안형편이 나아진 탓이리라. 그럼에도 우리는 아
직 주고 싶은 사람들에게 마음 놓고 선물을 줄 수 없는
곤궁한 처지가 계속되고 있다.

받기만 하는 미안함과 부끄러움에 편편치 않은 마음이지
만 명절 지내는데 보태라고 보내준 굴비, 과일, 고기, 등
의 꾸러미에서 먹지 않아도 배부른 풍요로움을 만끽하게
된다.

오늘은 뜻밖에 아주 귀한 선물을 받게 됐다. 초인종 소리
에 현관문을 여니 나주배 한 상자를 들고 온 아저씨가 서
있었다. 상자 위에 얌전히 매달린 편지봉투에 쓰인 보내는
이가 낯설다. 백미례...누굴까? 전혀 모르는 이름인데?

자경이 어머님께! 라는 봉투를 뜯고 보니, 세상에 자경이
가 좋아하는 지리선생님이 보내주신 과일이었다. 그 선생
님이 좋아 대학전공도 지리학과로 결정할 만큼 우리 딸이
존경하는 지리선생님은 이제 갓 서른을 조금 넘긴 여선생
님이시다.

아이들 사랑이 극진하고 끊임없는 연구자세로 성실하게 수
업에 임하는 선생님이시라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여학생들
에게도 존경을 받는 분이시란다. 1학년 때 지리을 배우고
그 후에는 선택과목이라 우리 딸은 지리를 배우지 못했다.

3학년이 되어 대학 전공을 고민하다 딸은 지리학과를 선택
하겠다고 선언했다. 지 아빠와 나는 너 좋아하는 분야라면
열심히 해보라고 성원을 했지만 주변 사람들은 지리학과
나와서 뭐 해먹고 살거냐며 걱정을 해댔다.

비인기 과목은 선생자리 얻기도 힘들데나 어쩐데나? 지리
학과로 결정을 하자 딸은 지리 경시대회에 도전을 해보겠
다는 결심을 했다. 그러나 선택과목에 섞인 세계지리는 배
워보지도 못한지라 입상을 바라 볼 처지가 아니었다.

그 때, 백선생님은 자경이 하나를 위해 일주일에 두번 특
별지도를 해주셨다. 2학년 담임으로 그 바쁜 와중에도 문
제집까지 손수 구해다 주며 그렇게 정성을 드릴 수가 없
었다.

선생님의 헌신적인 가르침에도 우리 딸은 지역예선에서
탈락했다. 수능 앞두고 시간 쪼개 지리공부를 따로 했던
공력이 수포가 됐으니 얼마나 허망했겠는가? 그 정도 공
부한 것 같고 경시대회 입상을 넘본다면 경시대회 상 안
받을 놈 있겠냐?

맥빠진 딸에게 이런 말로 위로를 했지만 그동안 독선생
노릇하며 고생 실컷 한 선생님이 더 미안해 하더라는 소
리를 듣고 보니, 어쩌면 그렇게 비단결같은 마음을 가진
선생님일까 절로 존경의 마음이 들었다.

고생한 선생님께 작은 선물이라도 드리고 싶었다. 어떤
것이 좋을까 딸과 고민하다 17개월 된 딸이 있다는 소리
를 듣고 예쁜 아가옷을 준비했다. 시댁이 남쪽 어디 섬
이라는데 그 멀리 할머니에게 아가를 맡기고는 한두달에
한번 정도 딸을 보러 간단다.

선생님 남편이 아직도 공부 중이라 혼자 벌어 남편 뒷
바라지 하고 시동생까지 거둔다니 보지 않아도 어려운
형편임엔 틀림 없었다. 아기 옷을 받으신 선생님이 너
무 좋아했다고 딸이 기뻐했다.

선물 준 나도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터무
니없이 고가품인 아기용품들을 감히 넘볼 수 없어 철
지난 재고용품에서 고른 옷이였는데 선생님 마음에 들
었다니 횡재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이번 추석 무렵, 지난 봄에 담은 매실차를 걸
러 자경이 편에 보냈다. 이 정도면 부담스러워 하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 잘난 것을 보내 드렸
는데 과일 상자라니, 너무 미안해 말이 안나왔다.

얌전하게 쓴 필체로 자경이에게 해 준 것도 없는데
이쁜 한나 옷에, 매실차까지...너무너무 감사함에 어
찌 보답해야 될지 모르겠다고 쓰여 있었다.

참말로, 선생님께 선물 드리는 것은 숫하게 봐왔지만
선생님께 선물 받는 학부모가 있다는 소리는 듣지 못
했다. 나는 어쩌면 이렇게 복이 많을까? 생전 그 흔하
다는 촌지를 드릴 줄 아나, 때마다 선생님 ?아가 선
물을 전할 줄 아나.

학기 끝난 뒤, 못난 내 새끼 거두시느라 애쓰셨다는
짤막한 편지와 함께 CD나 책 종류로 선물을 보냈었다.
이런 내 마음을 용케 헤아려 주시는 선생님을 만났다
는 것, 어찌 복이 아니겠는가?

자경이 초등학교 3학년 때도 담임 선생님께 초콜렛
선물을 받은 적이 있다. 착하고 조용한 처녀 선생님
이셨었는데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은 분이었다. 책도
많이 보신다기에 집에 있는 사상서나 최인훈의 광장
같은 소설책을 보내 드렸더니 재미있게 보셨는가보다.

자경이 전학가기 전까지 그 선생님과 교우를 한 좋은
기억이 있었는데 또다시 백선생님을 만났다. 살면서
이런 좋은 교사들을 만날 수 있는 행운이 내게 있는
한 정말 후회없는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이리라.
나주배 한 상자, 어떤 것보다도 귀한 마음을 받고, 지
금 나는 행복에 겨워 있다.

꽃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