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치마를 꺼내서 두른다.
고리를 목에 걸고 허리뒤 끈을 묶으며 지금은 H은행으로 합병 되어 없어져버린 충청은행의 마크가 새겨진 앞치마가, 조금만 더 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식탁위에 넓게 펴진채로 있는 모포와 화선지, 바닥에 마르라고 펴 놓고 갔던 내작품(?)들이 널부러져 있는걸 보며 미소가 나온다.
엄청 그림을 그리는 사람의 방 인것 같다는 생각이 순간 뇌리를 스친거다.
옆으로 줄을 죽죽 그어, 농도 연습을 한 화선지 몇장,
바위그리는 순서를 복사한 A4용지,
처음으로 그려본 소나무가 한장에 두그루씩 네그루...
누구라도 와서 보면 정말 부끄러울것 같아서 얼른 정리를 한다.
사기접시에 먹물을 어제보단 조금 따른다.
어제는 먹물을 너무 많이 따르는 바람에 먹물 없애느라 써보지도 않은 붓글씨 연습을 했었으나 오늘은 조금.
어제 그려놓은 소나무는 아무리봐도 소나무가 아니라 솔꽃이라 해야 좋을 것 같다.
솔잎 연습을 많이 해 보지만 어찌하여 끝이 뾰족하지않고 뭉툭하게만 나오는지,화선지 한쪽면을 솔잎으로 가득채워 놓고 쳐다보니 여전히 솔꽃을 못 벗어나고 있다.
새화선지 한장을 다시 편다.
소나무 몸체를 진한 농도의 먹으로 그리고 껍질 같은 부위를 나타낸후에 가지를 잘 정리하고...
"와우!!!"
여기까진 잘 했네. 혼자서 흐뭇하다.
커피물을 올린다.
앞면이 모두 창으로된 그이 아지트에 가을햇살이 발끝까지 ?아 들어와 발가락이 따뜻하다.
커피 한스푼 설탕두스푼 그리고 프림은 아주조금...
커피잔을 두손으로 감싸쥐고 입으로 갖다대며 향에 먼저 눈을 감는다.
행복과 편안함이 가슴을 꽉 채우는데 난데없이 그이생각이 나버린다.
"여보세요!"
"응, 왜?"
"난데, 나, 지금 너무 행복해서,자기한테 그기분 전할려구..."
"실컷 행복해봐, 자기 행복하면 나야 무조건 행복하니까. 열심히 하셔, 백화백!"
내 전화 받으며 기분 좋아하는 그이 얼굴이, 내앞에서 웃고 있다.
그이가 마련한 작고 볼품없는 아지트가 내게 이런 행복을 가져다 줄줄
은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미리 앞서생각한 그이에게 쓸데없는 돈 쓴다고 앙앙거렸던 내가, 오늘은 한없이 작아지는 느낌이다.
잔에 남은 커피를 마저 마시고는 다시 붓을 잡는다.
온정신을 모아서,
기둥만 서있는 나무에 옷을 입혀 소나무를 만들면서, 생명을 불어넣는작업이라도 하는양 숨마저 모아서 쉰다.
한참을 골똘하니 선하나가 두개 세개로 겹쳐 흔들려서 고개를 든다.
띄엄띄엄 서있는 감나무가 잎을 반쯤만 달고 빨간열매를 자랑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감채를 찾아 보아얄가 보다.
커다란키를 자랑하는 은행나무도 자잘한 은행열매를 매단채 잎을 바래며 서 있는게 영그는 가을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문화원 선생님은 추석 명절이 끼어 한주일을 그대로 쉬게 되니까 집에서 열심히 연습해서 연습한 흔적을 가져오라셨다.
소나무 열그루를 그려 오겠다고 약속을 해 놓았으니 숙제를 다 해 가려면 명절 지난후에는 열심히 그려야지.
가게도 한가하고 다리도 많이 나았으니
자기시간 만들고 몸좀 아끼라며 신경 써주는 그이에게,
멋진 그림솜씨 보일날을 고대하면서 붓에 먹물을 적신다.
"오~~~호! 오늘은 소나무가 어제보다 덜 솔꽃같네!"
雪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