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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끝자락에서 행복을 보다[5]-병동에서-


BY 더기 2001-01-06

어느날 잠에서 퍼뜩 깨어나 날 내려다 보고 있는 널 보았어.
의사는 분명 볼수없다고 했는데 열때문에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날 지켜 보고 있더구나! 말하진 않았지만 니가 꿈만 같다고, 이렇게 다시 함께할수 있어 참 좋다고 내게 말하는걸 들을 수가 있었어! 그 좁은 병원 침대에서 엄만 태어나서 가장 행복했단다. 엄마 지금 뭐하구 있는거니? 곧 따라가겠다던 마지막 약속 지킬수가 없었어. 너한테로 가지 못할까봐 너무 겁이났어. 견딜수 없는 그리움에 널 돌려 달라고...
지금 옆에 잠들어 있는 저 모습 니가 아니면 어쩌지? 어디선가 날 기다리고 있는건 아닐까 가슴이 미어진다. 널 이제 정말로 잊으려고 이러구 있는건 아니야. 다시돌아 왔건 그렇지 않건 내가 제일 사랑했던 사람은 너라는거 변함없어. 다만 엉킨채로 가슴에 묻어버렸던 지난 삼년 차곡히 다시 개서 마음에 담아 두려구...아빠가 보고 화낼까봐 이러구 있다. 사랑해 아가! .....내곁에 있는사랑 정녕 너이길...만약 천사로 돌아갔다면 나같은건 절대 그리워 말길.......내 목숨이 하늘에 닿아야 알수 있을 일이니 이 미칠듯한 그리움은 어쨋든 내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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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바다에 가도 울지 않을 자신있다고 남편에게 데려다 달라고 했는데 아닌가보다 글을 써내려 가는게 이렇게 고통 스러울 줄은 몰랐다.
무모한 짓을 한게 아닐까? 후회해봐도 활은 시위를 떠났다. 지난 시간을 잊고 싶진 않다. 고통 스러웠지만 망설임 없이 현재와 바꿀만큼 소중한 시간들이다. 내 사랑하는 아가가 있었으므로......그리고 우리 어머니가 그러길 바라듯 숨기고 싶은 과거로 묻고 싶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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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5월의 끝무렵.

병실 생활은 힘에 부쳤다. 중환자실서는 그저 통보받고 짐작만 하던

일들이 온통 내 몫이었다. 잦은 검사와 반복되는 채혈 투약 ,기록등등

정작 견딜수 없었던건 아이의 고통을 그저 지켜볼수 밖에 없는 현실이

었다. 그래도 내가 강해져야 아이를 살릴수 있다는 생각에 MRI기계에

같이 기어들어 갈정도로 극성을 떨었다. 골수 검사를 한번에 시키려

고 만류하는 의사를 뿌리치고 아이를 직접 붙들고....그렇게 하면 아

이를 살릴수 있을 줄 알았다. 독한 엄마 소리를 들어도 견뎌야 했다.

나중에야 알았다. 그 많던 검사와 채혈 자료들 그중 아이를 살리기위

한 것은 없었다. 그저 잘난 의사들의 연구를 위해 .....

그들은 그냥 자료가 필요 했을 뿐이었다.

...

몇번을 반복하고도 조지검사 결과는 확정 되지 않았다.

양성이라 했다가 악성이라 했다가.....어느날 젊은 소아암 전문의에게

불려 갔다. 젊은 나이에 꽤나 명성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퇴원후 그를 죽이는 꿈을 여러번 꿀정도 였는데 김문규인지 강문규인

지 이름조차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무튼 그는 애매한 말을 했다.

치료를 해도 살릴 확률은 없다고 했고 오히려 치료가 아이를 더 일찍

잃게 할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남편에게는 4분의 1의 확률을 이야

기 했다고 했다. 이렇게 기적적으로 살아 났는데 고통 스러운 치료 보

단 다른 방법이 있을 것 같았다. 일단 항암치료를 유보 했다.

수술할때 의사들은 더 절망 적이었지 않는가 ,종양을 제거 했으니 재

발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사회 복지 과에서 연락이 왔다. 9층에서 지하 1층에 내려가기가 너무

아득해 미루다가 이미 천만원을 넘어버린 병원비 탓에 혹 도움이 될

까 해서 아이를 남에게 맡기고 복지과를 찾았다.

부모가 돈 때문에 아이의 치료를 거부해서 불렀단다. 치료비의 일부

를 보조해 줄테니 다시 생각해 보라고....어이가 없었다. 연구 대상

을 잃을까봐 의사가 그리 말을 전했던거였다.그 의사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암이란 말에 치를 떨며 쫓아온 어머니에겐 가망없는 일에 부모

가 매달리는 자기는 의사된 도리로 따라줄 뿐이라 했단다.

나중에 안 사실이었다. 마지막까지도 내가 못하는일을 그가 해줄꺼란

믿음에 아이를 내맏겨 버렸다. 우리 아기를 보내놓고 몇분뒤 회진길

에 웃고 있는 그를 보았을 때에야 젊은 나이에 그 명성을 얻기 까지

그의 무모한 모험에 사라졌을 많은 어린 생명을 떠올릴수 있었다.

소아과로 옮겨오고 날마다 시어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남편에게 6인실

로 옮기라고.....항암 치료로 면역 수치가 떨어져 1인 실로 옮기고 싶

었지만 2인실에 머무는 것도 얼마가지 못했다. 부도를 내고 숨었던 친

정 오빠가 돈을 해오면 남편은 더럽다고 받지 말라고 했지만,치료비

안내면 치료가 소홀 할까봐 아버지 생전에 받았던 훈장까지 팔아가며

병원비는 미루지 않았다.

암이란 소릴듣고 '우리집안에 그런 더러운 일이 생긴게 분해'알아 누

웠다던 시어머니가 쫓아 왔다. 혹 아이 먹을 꺼라도 챙겨 왔나 해서

속없이 반가 웠다. 집에서 끓인 죽한번 먹여 보는게 소원이던 그때 였

으므로....

들어서자마자 짐을 싸라고 했다. 백에 하나 완치되어도 눈도 보이지

않을 텐데 살아 뭐하냐고..장애를 죄받음 쯤으로 생각했던 그녀였으므

로 혹 아이가 살아나 장애를 지고 살까봐 두려웠던 모양이었다. 아니

집안에 장애아가 생길까봐 싫었던 모양이다.

아이가 들으니 제발 나가서 말씀하시자고 끌어내도 막무가내로 업고

가겠단다. 결국 결론은 돈이 었다. '너 돈 그렇게 많으냐?'병원 좋은

일만 시킬테냐? 결혼해서 줄곧 고정적으로 돈 백을 들고 온적이 없는

남편이었다. 사업한다고 애 낳을 돈까지 빼내가면 엄마가 채워 주고..

도대체 내가 누구돈을 들어 먹는다는 것인지....

옆병상에 큰아이가 울고 있었다. 그건 곧 내 아이의 울음이 었다.

모든걸 받아들인 지금도 어머닐 용서할 수 없는것은 내 아이에게 상처

를 주었기 때문이다.

결국 너 내말안들어 내앞에서 후회할날 있을 꺼라며 집으로 돌아가고.

그 서슬탓에 6인실로 옮기게 되었다.

얼마전에야 엄마 한테서 그날 새벽 나를 설득시키라고 전화를 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

무균실로 통하는 6인실에서 난 전보다 깊은 외로움과 절망을 느꼈다.

같이 아픈 아이를 가졌음에도 백혈아이들과 달리 몸조차 가누지 못하

게된 우리아이를 경계하곤 했다.자신들의 아이는 돈만 있으면 살릴수

있다고 머리가 아니라 참 다행이라고 서습없이 말하곤 했다. 잠시 식

기를 내놓으러 간 사이 아이가 구토를 했는데도 다들 TV를 보고 있는

모습에 날 지탱하던 무언가를 노쳐버린듯한 절망을 느꼈다.

오히려 자리를 자주 비우는 엄마를 대신해 다른 아이들 치닦거리 까

지 해야 했다. 점점 병원 생활이 더 힘들어 졌다.

그러던 어느날 등너머의 회색옷 입은 여자를 보았다. 아이가 설사가

심해 애먹고 있는데 애처로운듯 지켜 보고 있었다.

엄마에게 말하다 보니 돌아본 기억이 없다 .돌아보지 않았는데 표정까

지 생각이 나다니... 엄만 꿈일꺼라 했다. 불길한맘에 밤을 세워 아이

를 지켰다. 수치가 떨어지고 혈소판 수혈을 받기위해 애쓰던 어느날

아이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다. 일인실로 옮기기로 하고 다녀오니 대수

롭지 않다던 의사가 황망히 움직이고 어느새 '코드블루'하며 담당의

를 찾는다. 이름도 병주인 레지던트는 계속 오늘 각오 하란 말남 되풀

이 하고..... 아빠에게 연락하라고....아이를 뺏어서 처치실로 데려

가 버렸다 ...남편이 오고.... 아이를 고통에서 놓아 주란다 ....

그리고 그가 말했다.생각보다 빠르네요. 그말과 동시에 울아버지 가실

때 보았던 장례식장 담당자가 앞에 나타 났다. 지하 1층에서 5층까지

오려면 ....미리 연락한 것이다. 집으로 데려가겠다고 하니 안된단다.

일인실에 잠깐만 있게 해 달라고 비굴하게 사정을 했다. 암만 해도 자

고 있는것 같았다. 부르니 눈을 뜨려는것만 같았다. 두달동안 한번도

아이가 날떠날꺼란 생각은 해본적이 없었다. 결국 아이를 빼앗기고 지

로 내려 갔다. 차가운곳에 하루를 두어야 한다는 사실이 아이를 잃어

버린것보다 몇배 고통 스러웠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후회스럽다.고통

은 잠시 접어두고 아이가는길에 제대로 배웅을 해주어야 했다 못난에

미는 끝까지 제고통에 겨워 그렇게 널브러져 있었다.악을쓰다 깨어나

면 구르고 어떻게 해도 고통은 감해 지지 않았다. 시어머니를 위시해

소위 식구란 사람들이 왔다.거봐라 하는 얼굴을 보자 참을 수가 없었

다. 그날 아이에 얼굴에 스치던 절망을 ....그러나 우는것 외에 소리

를 지르는것 외에는 할 수있는 일이 없었다. 엄마는 나때문에 울고...

쓰러져 있는데 어렴풋 웃음 소리가 들렸다. 누가 이런곳에서 잡담을

하는건지 접촉사고이야기에 웃음 꽃이 피었다. 호상에 그러는 경우는

보았으나 인상이 써졌다. 눈을 찌푸리고 보니 남편 친구들이었다.

손을 내저었다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악을 썼다 ."저사람

들 제발 가라고 해!"그러고는 정신을 잃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