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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끝자락에서....[4]지하 3층 사람들


BY 더기 2001-01-06

예전엔 종이가 아니면 글을 쓰지 못했었다.
젖지 않는 종이가 있다는게 참 좋다.
남편이 일박이일로 출장을 갔다. 오늘이 아니면 끝내지 못하리라는 강박증이 다시 날 이자리에 앉게 한다. 달가와 하지 않을 그이기에 그가 없는 이시간 모든걸 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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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비아저씨의 협박과 회유에도 수술실 문옆에 붙어 7시간을 보냈다.

아이에게 같이 있어 주겠다고 굳게 약속 했지만 규정을 어기고 억지

를 부려서 할수 있는 일이 고작 그것이었다.

그리고 가서 기다리지 않으면 아이를 보여 주지 않겠다는 협박에

어머니의 손에 끌려 도착한 곳이 바로 지하 3층이었다.

병원의 배려로(?) 지하 3층 주차장옆 창고를 손봐 만든 그곳은 뉴스에

서 본 수재민 수용소 같았다. 당신아들 재워야 한다고 억지로 남의

베개까지 끌어다 주는 시어머니의 강요에 48시간 만에 자리에 누웠다.

남편이 코를 곤다. 그소리가 마치 마취제처럼 울컥 목을 싸하게 했다.

다시한번 꿈이게 해달라고 기도 했다. 이렇게 긴 꿈이 없다면 차라리

내가 사고가 나서 위에 누워 꾸는 꿈이게 해달라고...

찢어질듯한 인터폰소리에 불려 5층에 올라 갔다.

내 아기가, 너무 작은 나의 천사가 많은 줄을 달고 가쁜 숨을 쉬고 있

었다. 주사한번 나눠 주지 못하는 못난 에미는 그저 가지 말라고 날

버리지 말라고 아이에게 매달렸다. 고통은 온통 아이의 몫이 었는데..

의사들이 안구적출 운운할때 그렇게까지 하면서 살아서 뭐하냐고 하

던 시어머니는 또오마 하며 돌아 가고 남편은 직장에

엄마는 큰아이때문에 일찌감치 집에....혼자 남겨 졌다.

하루 두번 30분 씩의 면회시간 외에 내가 살아있을 이유는 존재 하지

않았다. 구석에 쭈그리고 눈이 붙어 눈물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울었

다. 그러다 혁이 엄마(본인이 원하지 않을까봐 가명을 쓴다)를 알게

되었다. 면회를 위해 줄을 서있는데 반갑게 아는 척을 해왔다.

우리 아이도 같은 경우라며 예쁜아이라고 말해 주었다 병원 와서는 처

음으로 듣는 예쁜아이라는 표현에 눈인사를 했지만, 별로 달갑지 않았

다. 그때 심정으로는 세상고통은 나 혼자 다 짊어진것 같고 아이아픈

엄마치고 너무 맑은 목소리 조차 거슬렸다. 얼마가 지나지 않아 다른

엄마에게 그렇게 다가서고 있는 날 보게 됐지만......

그곳에선 다들 그렇게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 주었다.


피붙이를 중환자실에 떼어놓고 한평도 못되는 은박 돗자리와 사물함

한칸 목으로 넘어가는 밥한 술의 호사도 죄스러워 하며,일반 병실로

올라가는 사람에겐 아낌없는 축하를 해주고,홀로 보호자만 집으로 가

게 되면 자신의 일처럼 안타까와 했다.

우리가 해 줄수 있는건 짧은 면회시간 동안 수건을 적셔 몸을 닦아

주고 어루 만져주며 함께 할수 없는 아픔을 전하는 것이 었다.

식은 밥을 나눠 벅고 손수건을 말리러 병원 문전에서 시간을 보내며

한 식구가 되어가고 있었다. 아픔의 경중을 감히 매김할 수야 없지만,

가벼운 수술로 스쳐가는 사람들이 가끔 소란을 일으킬때도 언제나 맥

없이 물러나느 쪽은 길게는 6개월넘게 주차장 화장실을 부엌 삼아 욕

실삼아 지내온 그들이었다.

지하3층 사람들은 주말을 제일 싫어 했는데 체면 치레로 들러서 금쪽

같은 면회시간을 갉아 먹고 가는 친지들 때문이었다. 나도 예외는 아

니어서 번번히 조직검사 결과에 핏대를 세우며 '암이래냐?'몰아 세우

는 시어머니를 위시해 사람들의 배려 없음에 지쳐가고 있었다.

큰집 조카들은 따라와서 심심하다하고, 시어른들은 당신딸 다이어트

효과 있다고 야채 살곳을 찾고......

집팔아 병원비 대겠다며 걱정하는 친정엄마께 "내딸은 저러고 있는데

엄마딸 걱정하지마! 난 엄마 딸이 대신 죽었음 좋겠어! 내걱정 하지말

란말이야!"하며 ?I한 억지를 부리고 , 그런 시댁에 큰애를 맏기기 싫

어 엄마는 병원에도 못오게 했다.

그러던 중 시어머니의 환갑이 되었다. 남편은 같이 가자고 했다.

아이를 두고 갈수 없다고 , 선물은 어떡할까 묻길래 알아서 하라고...

남편이 불같이 화를 냈다 우리때문에 여행도 취소 하셨는데 니가 먼

저 신경써야 할꺼 아니냐고 내가 못돼서 동정조차 받을 자격이 없다

고 했다.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어머니는 예정대로 여행을 가려 하셨

다고... 그나마 아버님이 사람도 아니라 해서 집잔치로 돌리고 말았다

고....그리고 다녀와서 남편은 음식을 싸왔다. 갈비 잡채 사라다.....

지키고 서서 먹으라고 했다. 그걸 먹고 토하는 등을 두드려주며 혁

이 엄마가 말했다. 미움을 버리라고 엄마가 슬프면 아기가 알아 본다

고.....'엄마가 베푼 덕이 아이한테로 간다.'며 해 말게 웃어 주었다.


그날이후 난 달라 졌다. 혁이 엄마를 따라 예배도 나가고, 공동 냉장

고 청소도 하고, 환자들에게 줄 소변줄 고정대도 만들고, 똑같은 가

제 손수건이라 바뀌어버려 속상해 하는 할머니껜 이니셜도 새겨 드리

고, 할머니들 말벗도 해드리고, 새로와 망연자실 해있는 사람에겐 어

줍잖은 위로도 건네고.....늘 기도하고 남편 비위도 건드리지 않으려

고 노력했다 아이가 사랑하는 아빠니까!

아이가 기적처럼 좋아 지고 있었다. 아니 기적이 일어났다. 입에 물

린 호흡기를 부주의한 틈에 아이가 스스로 빼서 자가 호흡을 시작 했

다는 것이다. 목에 튜브 삽입을 하겠다고 통보받은 그날...

나는 굶으면서도 간호사들 간식에 아부에 아이곁에 머무는 시간도 조

금씩 늘려 갔다. 어느날 비번을 바꾼 낯선 간호사에게 무참히 ?겨나

울고 있는데 소아과 병동에서 아이를 업고 있는 아기 엄마를 보았다.

한번이라도 다시 한번이라도 우리아기 다시 업어 줄수만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고 싶었다. 조금 다정해진 남편에게 부탁해서 새 포대기

를 샀다. 늘 언니꺼만 물려주고, 부모는 기다리지 않는다고 시어머니

부모형제 생일 까지 챙기느라, 아무것도 해준것 없던 우리아가에게

내 희망을 전하고 싶었다.

그렇게 아이곁을 지키면서 못볼것도 많이 보았다.

의사의 실수로 어처구니 없이 죽어버리는 환자들.....

내가 그랬듯이 살붙이 목숨맡긴죄로 허리한번 못피다가 그렇게 잃어버

리고는 감당 못할 슬픔에 따져묻지 조차 못하는......거기에 약한번

새로 쓸래도 받는 죽어도 좋다는 각서.....

...

지하삼층사람들에게 가장 두려운건 '코드블루' 방송에서 다급한 목소

리로 코드블루가 뜨면 자다가도 일어나 해당과가 아니길 가슴쓸며,

단 한명의 해당자가 나온후에야 안도의 숨을 쉰다. 거의 예외없이 불

려 올라간 사람들은 다음날 짐을 싸고 아무 위로도 건넬수 없는 남은

사람들은 그저 죄인 처럼 움추리고 있어야 했다.

6개월 방장 테일러 아저씨도 집으로 돌아가고 낯선 얼굴들로 방은 다

시 채워지고.....

어느날 돈찾으러 로비에 갔던 씩씩이 거제도 언니가 울며 돌아 왔다.

어느 화려한 차림의 여자가 목에 튜브를 끼우고 지나가는 환자를 보고

"저렇게 까지 하면서 살고 싶을까?" 하더라고.

노조일로 꿈자리 사납다고 만류하는 부인 손 뿌리치고 나선 남편이 동

료의 운전 조작으로 식물인간이 되었어도,염증때문에 의사가 포기할때

까지 뇌수술을 해댈때도, 간호때문에 시골에 떼놓고온 9개월짜리 둘

째 이야기를 할때도 굳세게 울지 않던 언니가 울고 있었다. 그 불행

은 철저히 남의 몫이라고 생각하는 여자가 던진 말한마디에 지하 3층

식구 모두가 어느새 꺼이꺼이 울고 있었다.

......

그곳에 와서도 남편때문에 망연 자실한 여자들보고 어떻게 아들을 둘

씩이나 낳았냐고, 3년만에 회복한 아이를 보고 집안 말아 먹었겠다 못

을 밖던 시어머니도 점점 발길이 뜸해지고 그것도 생활이라고 적응을

해가고 있었다. 해 앞에도 나가 앉아 있을 수 있게 되었을때 또 일이

터졌다. 혁이 엄마는 알고 있었는데 혁이 아빠가 예배 이야기를 남편

에게 한것이다. 자신의 엄마가 불교에 다닌다는 이유로 교회를 무슨

범죄집단 다루듯이 하는 남편이 그냥 넘어가리라 기대하지 않았기에

그때 그때 핑계를 댔던 터 이었다. 절에 다니면서도 가족을 위해 집에

서 개를 잡고 며느리에게 유산을 강요하는 위선 때문에 어느새 나도

어머니의 종교를 부인하고 있었다. 화를 낼줄은 알았지만 수술실 앞에

서 누구에게 기도 할지 몰랐다고 말하던 그엿기에 이번은 눈감아 주

지 않을까 기대했다. 하지만 구석으로 끌고간 남편은 사람들이 다 듣

도록 소리를 질러댔다."

"돈을 갖다 바치는 것두 아니구 기도원 같은데 빠지는 것두 아니구

그냥 기도 만 할께! 부탁이야. 한번만 봐 줘!" 애원 했다.

예수가 살려주겠다고 하더냐고 차라리 사이비 종교를 믿으라고

왜 교회냐고 ....그 눈빛에서 살기를 느꼈다

그리고 다시는 남편을 사랑할 수 없게 되었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서라도 살릴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다"고 울고

매달리는 내게 남편은 죽일듯이 덤벼 들었다. 혁이 아빠가 ?아와 말

리지 않았더라면 무슨일이 일어났을지도 몰라 씁쓸하다....

남편이 병원에 있는 시간은 극히 짧았으므로 계속 나가도 무방했겠지

만 내가 신을 욕보이는것 같아 남편몰래 아이에게 세례를 받게 하고

맘속으로 기도를 하는것으로 참았다. 게다가 일반 병실로 옮기면서 화

장실갈 시간도 귀했던 나로서는 남편이 아니더라도 예배를 게속 보는

일은 무리였다.

조직검사가 몇번을 번복하고 아이가 목으로 음식을 넘기고 소리도 낼

수 있게 되어 일반 병실로 옮기게 되었다. 응급실서 압력이 들어와 병

상이 모자라자 예정보다 빨리 9층 신경외과 2인실로 옮기게 되었다.

혼자서 아이를 보게 되니 지하에서 짐을 옮겨오고 할일이 걱정이었다

엄마가 있는곳은 차가 끊길 시간이고 남편에겐 언제나처럼 연락이

안돼 시어머니께 전화를 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혹시 반갑게 달려와 주시질않을까?

"싼방 달라그래라."그 한마디만 남기고 먼저 끊긴 전화.

셋방사는 사람까지 거두고 남에일에 늘 발벗고 나서던 내가 본 그녀

의 모습은 위선이 었을까?

막막하긴해도 아이와 함께 있으니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았다.

노크소리에 문을 여니 근호 엄마가 문을 빼꼼이 연다.

나이는 나보다 아래인데 벌써 큰애가 열살이고 5살짜리 둘째랑 시어머

니랑 같이 남편 병상을 지키고 있는 그녀였다.한달넘게 지하3층서 남

편 깨나기만 기다리는 너무도 여린 그녀가 웃고 있었다.

사물함에 있던 내 짐 그리고 식은 밥이라고 멋적게 웃으며 과일까지

챙긴 밥을 내민다. 그렇게 그렇게 절망속에서 행복을 가르쳐준 사람들

과 함께 했던 지하 3층에서의 한달 남짓은 근호 엄마가 나를 울리면

서 끝이 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