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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머니의 용돈"


BY swan 2000-06-14

우리 시어머님은 6년전에 솔로가 되셨다.
시아버님이 계실때는 그렇게 아버님을 구박하더니 막상 돌아가시고 안계시니 종종 아버님을 그리워 하신다.
"얘 너 아버지는 얼마나 쫌생인지 밥풀하나 못버리게 하고 내가 마실이라도 갈라치면 꼬치꼬치 어딜가냐 몇시에 올거냐 그런 시집살이가 없다." 하시며 며느리만 모이면 시아버님 흉을 보셨다.
우리는 18년전에 결혼을 했다.
총각때 남편은 시부모님과 함께 생활을 하고 있었다.
장남은 아니었지만 천금같은 당신의 아들이 회사식당 밥으로 살이 가겠냐는 시어머님의 각별하신 아들사랑으로 13평 아파트를 3분의 2나 되는 빛으로 구입해서 살고 있었다.
결혼을 하고보니 시부모님에 다달이 월급의 3분2가 집값원금에다 이자로 나가고 있었다.
한달 생활비는 커녕 시부모님 술값에다 용돈 대주기도 힘겨웠다.
그나마 방이 두칸이었기 망정이지 겨울이면 연탄값을 아끼느라 우리방은 불도 넣지 못했다.
찬 방에 자고 어떻게 회사에 나가 힘든일을 하겠냐며 한사코 당신의 아들을 불을 넣은 당신의 방으로 데리고 가시는 시어머니
나혼자 독수공방 온밤을 추위로 덜덜덜 둘이 자면 열만 잘나던데........
그렇게 일년을 신혼같지 않은 신혼을 보내고 나자 시부모님은 큰결심은 하시고 짐을 사셨다.
장남도 아닌데 막내인 우리에게 부담을 끼치기 ?袖맒척募?시아버님의 강경함에 시어머님도 두손을 들고 본가인 부산으로 가셨다.
임신으로 입덧이 심했지만 월급을 받으면 한달에 한번씩 시부모님의 생활비를 들고 부산에 가야했다.
그정도의 시집살이는 해야 한다는 시어머님의 엄명이었다.
한달에 한번씩 보는 며느리가 뭐가 그리 잘못하는게 많은지 어머님은 볼때마다 야단을 치셔서 항상 눈물만 솟다가 집으로 오곤했다.
장남인 큰댁이 여유롭지못한 탓으로 모든부담은 우리에게 돌아왔다.
생활비도 우리 병원비도 우리몫 집안대소사 경조비도 우리몫
남편의 월급으로 너무나 힘이 겨워 이렇게 생활해서는 않돼겠구나 싶어 어머님께 부탁을 드렸다.
여유가 있을때까지만 생활비를 드리지 못하겠다고
그날 저녁 우리 부부 끝장나는줄 알았다.
시어머님은 아들에게 전화해서 내가 며느리한테 그런 대우받을려고 너를 그렇게 고이고이 길렀더냐 불효막심한놈 니 애비 애미는 죽어 꼬꾸라 져야 하겠지 오냐 다죽으마 하시며 전화통에 불이 났고 나는 신랑한테 맞아 죽을뻔 했었다.
그렇게 결혼후 18년동안 한달도 시어머님의 생활비와 용돈을 걸런적이 없다.
얼마전 어버이 날을 며칠앞두고 시어머님을 뵈려갔다.
혼자 계시기 때문에 시어머님께 갈때는 한달정도의 반찬을 해갖고 간다.
어버이날 앞이니 이것저것을 챙기고 용돈 봉투도 마련하여 하루밤을 지내고 집으로 오기전 화장실을 갔다가 미쳐 화장지를 챙기지 못해서 다시 방으로 들어오다 어머님과 남편과의 엄밀한 거래를 목격하고 말았다.
그전에도 감은 잡고 있었지만 직접 보지 못했기에 남편에게 따질수가 없었다.
두사람의 어정쩡한 표정? 나는 모른체 하고 화장지만 들고 나왔다.
화장실에 앉아 가만히 생각하니 왠 뜨거운 눈물이.......
남편이야 자기의 어머니를 생각해서 그랬겠지만 어머님에 대한 야릇한 원망이 솟구쳤다.
평소 어머님은 내가 봉이었다.
뭐든지 청구만 하면 나는 조금 아껴쓰더라도 노인네가 용돈이라도 든든해야지 살아갈 맛이나겠지 하는 심정으로 월급타면 붙일께요였다.
그런데 남편에게 또 따로 용돈을 받고 있었다니.....
남편이 어머님께 준돈이 아까워서가 아니다.
그래도 18년이란 세월동안 어머님과 나와의 어떤 신뢰감이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한번쯤 나에게 말할수도 있었을텐데
"얘 애비가 용돈을 주더구나"한번만이라도 어머님이 직접 말씀해 주셨으면 내마음이 이토록 허전하진 않았을텐데.........
모르지 시어머니 입장에선 또다른 생각이었는지........
돌아오는 2시간여동안 남편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