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작가

이슈토론
14세 미만 아동의 SNS 계정 보유 금지 법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배너_03
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조회 : 376

아름답게 늙어가는 방법 33


BY 녹차향기 2000-12-21

오늘은 아주 일찍 아.컴에 들어와서 기분이 좋아여...
그만큼 한가한 시간이 있다는 뜻이므로!
어제는 입주해서 지금까지 사용한 씽크대를 대대적으로 교체했어요.
친구들 모임에서 곗돈을 탔는데 과감하게도 씽크대를 갈았지요.
얼마나 깨끗하고 좋은지 아이들도 모두 새 집에 이사온 것 같다고 흐믓해했지만 누구보다 젤 좋은 사람은 바로 저... ^.^

늦게까지 부엌 가재도구 정리땜시 힘들었지만 오늘 작은애 학교에서 한 학년을 마무리하는 마무리잔치가 있어서 거길 참여키 위해 부랴부랴 정신없이 서둘렀지요.
"여보, 무국 끓여 놓았으니 밥 한 수저놔서 말아먹구 나가요. 굶지 말구...먼저 간다앙..."
늦게 일어나는 남편에게 소리를 질러놓고 학교로 열씨미 뛰어갔지요.

9시30분, 아이들이 그간 준비한 연극과 노래, 율동을 선보였어요.
2학년이라 제법 의젓해지긴 했어도 아직 얼굴엔 천진난만한 장난끼가 줄줄 흐르고, 또 몇몇 아이들은 아기 같은 앳된 얼굴이 얼마나 귀엽고 예쁜지, 유달리 아이들을 좋아하는 저는 그 모습에 매료되어 정신없이 재롱을 구경했지요.

선생님이 주신 극본을 지들끼리 의논해가며 연습을 하고, 소품도 지들이 만들었다고 하니 어찌나 기특한지.
대사를 중간중간 까먹기도 했지만 1학기때보단 월등한 연기력을 발휘했어요.

작은애 담임선생님께서는 교과서에 나온 것 이외의 활동을 무척 많이 해주셨는데, 이렇게 연극연습을 해서 발표를 하거나, 달달이 그달의 아이들 생일잔치를 벌여주시거나, 자전거로 여의도 한강고수부지까지 하이킹을 간다거나(못 타는 아이들이 많아서 선생님외 몇명의 참석으로 그친 행사였지만), 책을 아이들에게 사오게 하여 한 학기가 끝나도록 서로서로 돌려읽고 독후감을 쓰게 하시거나, 동시쓰는 공책을 마련하여 시간 나는 틈틈이 아이들에게 직접 시를 쓰는 시간을 갖게 하거나, 부직포로 버선을 만들게 하여(아이들의 바느질 솜씨가 의외로 놀라웠어요..) 벽에 걸어두고 그 버선안에 친구몰래 사탕이나 초콜릿을 넣어주게 하고...

참 깊은 뜻과 사랑으로 아이들을 가르쳐주시는 선생님이시랍니다.
이런 좋은 샘님을 만난 것은 진짜 일생일대의 행운이 아닐수 없어요.
한 학기를 마무리하며 이렇게 잔치를 열어 어머니들을 참관시키는 것도 드문 일이지요.

요즘 아이들, 천방지축 정신없고 이기적이고 손톱만큼도 남에게 지고 싶어 하지 않는데 우리 반 아이들은 좀 다른 것 같은 것은 저 혼자만 느낌은 아니라고 생각해여.
개개인의 장기자랑이 끝나고, 이제 마지막으로 촛불의식시간이 되었지요.
한사람씩 한사람씩 옆으로 불이 전달되고 고사리같은 아이들 손엔 환하게 불이 켜졌어요.
흔들지는 불을 진지하게 바라보는 아이들에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어요.

"일년동안 소리만 지르고, 야단만 치는 선생님을 잘 따라준 너희들에게 무척 고맙다고 생각해.
이제 다시 만나게 되면 너희들은 열살이야. 한 살 더 먹은 만큼 더 의젓하고 씩씩해져서 돌아오길 바라고, 이 사회 어디에서도 늘 자기일을 열심히 하고, 성실하게 사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어.
우리 앞으로 20년 후에 만나기로 약속한 것 잊지 않았지?
그때 다시 만나면 멋진 청년이 되고, 멋진 여성이 되어있을 것을 믿어. 어떤 일을 하고 있던지간에 어느 자리에 있던지 간에 선생님 가르침을 잊지말고....."
선생님은 목이 메어 미처 말씀을 잇지 못하셨어요.

그러자 촛불을 묵묵히 바라보던 아이들도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어요.
몇몇 아이들의 흐느낌이 반 전체로 물결처럼 퍼지더니 어떤 아이는 아예 통곡처럼 울기 시작했지요.
"자, 선생님 말은 그만 듣고, 주현이부터 1년을 정리하는 말을 하면서 촛불을 앞에 놓기로 하자."
아이들도 선생님 못지않게 진지한 모습으로 말을 이었지요.
그중에서도 개구쟁이로 유명했던 남자녀석들이 눈물,콧물 흘려가며
"선생님 말씀도 되게 안 듣고 장난만 쳤고, 친구들도 괴롭히고 뭐 빌려주라고 할 때 빌려주지도 않았는데, 잉잉....잉잉....
이제 3학년되면 더 착하고 선생님 말씀도 잘 듣는 사람이 되겠어요..."
할 때는 가슴이 찡하더라구요.

아이들을 비디오카메라에 정신없이 찍고 있던 저두 카메라 렌즈가 흐릿하게 가려지더니 눈물,콧물이 쏟아졌지여.
ㅠ.ㅠ ㅠ.ㅠ
이렇게 좋은 선생님, 이렇게 좋은 친구들, 이렇게 좋은 시간들, 이렇게 좋은 추억들을 어디서 다시 만날까요?

참관한 엄마들도 손수건을 꺼내 훌쩍이는 콧물을 닦아내고, 붉어진 눈을 휴지로 콕콕 찍어내었지요.
너무나 따뜻하고 잊을 수 없는 광경이었어요.
이 아이들이 아주 커서 어른이 된 어느 날에도, 2학년을 마무리하는 어느 겨울날 엄마들이 몇몇 와서 저희들 재롱을 구경하고, 촛불을 켜놓고 선생님과 함께 목놓아 울었던 일을 오래오래 기억해 주겠지요?

어린 날은 무척 짧기만 해요.
아쉬울 정도로 정신없이 지나갔건만 그 당시엔 빨리빨리 커서 무조건 어른이 빨리 되었으면 하고, 크면 이렇게 이렇게 해야지, 무슨무슨 일을 해야지 하고 바라기만 했었건만 막상 어른이 이렇게 되고 나니 어찌나 세월은 잘도 흘러가고, 어찌나 세상은 정신없이 돌아가는지.
어른이 될 수 있는 자격이나, 부모가 될 수 있는 자격과 심사를 미처 받을 시간도 없이 주어진 역할들이 때론 너무 버겁게 우리를 누르는 것만 같아요.

교실정돈을 좀 도와주고 그간 얼굴을 익힌 엄마들과 교실의자에 앉아 따뜻한 녹차를 나눠마시고, 선생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돌아왔어요.
이렇게 좋은 선생님과 헤어지는 아쉬움은 크지만, 이런 선생님이 아직 우리 교육계에 남아있는 한 우리 아이들의 미래는 무척 밝을 거라고 생각해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굳건히 교단을 지키고 계신 이 땅의 많은 선생님께 아울러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학교에 찾아가는 일이 무척 부담스럽고 어려운 일이라 다들 꺼려하지만 이런 선생님께 박수를 보내지 않는다면 선생님들 어깨는 더 처질 수 밖에 없어요.
선생님. 머리숙여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그런 선생님을 위해 예쁜 감사의 편지라도 올려야겠어요.
방학동안에 아이들 편지말고도, 아이들 엄마의 편지를 받으시면 더 기쁘시겠죠?

바뀐 씽크대 앞에 노오란 해바라기 조화를 나란히 줄 맞춰 놓았어요.
그랬더니 겨울이 어디론지 사라진 느낌이 아주 새롭네요.
그 앞에서 편질 써봐야겠어요.

일단 맛있는 저녁식사부터 준비하고요.
모두 행복한 시간 되세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