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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게 늙어가는 방법 31


BY 녹차향기 2000-12-17

드디어 김장을 끝냈어요.
110포기의 배추가 예쁜 고춧가루옷을 입고, 다정하게 도란도란 항아리에, 김치냉장고에 들어가 앉아있어요.
배추를 씻어서 물이 빠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미나리,쪽파,대파 이런 것들을 잘게 썰고 마늘,생강을 갈아놓고 시어머님은 거의 졸도하실 지경이었어요.
왜냐구여?
바로 고춧가루 때문이었지요.

"워매.워매... 속타 죽것네. 이렇게 기다리고 있느니 차라리 내가 진도를 갔다왔겠다..."
전전날 택배로 고춧가루를 보내주시기로 한 친척형님이 깜박 잊으시고 뒷날 보내시는 바람에 우리가 배추를 다 씻어건져놓고, 속을 전부 준비하도록 고춧가루가 도착하지 않는거예요.

성격이 급하신 시어머님은 진도에 전화를 하셔서는
"아, 긍께 왜 전날 보낸다고 해놓고 안 부쳤냐.. 이때까지 고춧가루가 안오면 저 배추들을 다 어쩌라구.... 내가 미쳐버리겠네. 진짜.."
하고 성화를 하셨지만 뭐, 그 형님도 이미 택배로 부치셨으니 뾰족한 수가 있나요.

김장을 담그는 것을 알고는 이웃에 친하게 지내는 현신엄마, 은비엄마,웅식엄마가 왔다가는 맥없이 고춧가루를 기다리고 있는 고부간을 위로해 주었지요.
"주말이라 택배도 많고, 길이 밀리나봐요. 어머님, 맘놓고 기다리세요. 오늘중으로 온다잖아요."
"아야! (어머님이 저를 부르실 때 쓰시는 호칭), 그 택배회사에 전화해서 빨리빨리 보내라고 해라. 내가 숨이 넘어갈려고 하네...
워매, 워매... 새벽시장가서 펄펄 뛰는 새우를 사다가는 죽여서 맛도 없이 해서 쓰것네..."

어머님은 맛있는 속을 만드신다고 새벽일찍 노량진 수산시장에 가셔서 펄펄 뛰는 새우하고, 굴을 사오셨는데, 고춧가루가 도착을 안 하니 얼마나 애가 타시는지, 오전 11시쯤 도착할 줄 알았던 고춧가루가 점심을 먹도록 안 오는거예요.
택배회사에 전활하니 아침 10시에 물건을 싣고 나갔다는 건만 알지 배달기사하고는 연락이 안되니 무조건 기다리라는 성의없는 대답만 하겠지요?
배추를 씻어놓고 기다리는 중이라고 해도 소용없었어요.

2시가 넘었어요.
또 3시가 넘었어요.
늦어도 6시경이면 온다니깐 우린 아예 맘 느긋하게 먹고, (이때쯤 어머님은 거의 포기상태가 되었답니다.) 이 얘기, 저 얘기 하며 시간을 때우고 있었지요.
은비엄마는 딸내미가 불러서 집에 가고, 웅식엄마는 아이들이 할머니댁에 가고 싶어한다고 집에 가고, 현신엄마도 딸애가 열이 나고 저녁준비도 좀 해야한다고 가고...
시계는 6시가 넘었지요.
해가 져서 어둑어둑 해지는 하늘을 바라보니 참, 허무한 마음이 들더라구여.

이렇게 하는 김장은 어머님 평생에 처음이시라며,
"아무래도 올해는 뭐든 기다리라는 재순가 보다..."
라고 풀이하셨어요.
사실 12월경 시작하시려던 일도 예정보다 늦어져서 1달정도 연기되어 기다리시고 있는 상태거든요.
"그래도 기다림이 있는 사람은 얼마나 좋아요. 그 기다림마저도 없으면 사는게 희망이 없잖아요...."

성격이 급하신 어머님의 조바심은 드디어 극에 달했어요.
"내가 이 택배직원 오기만 하면, 멱살을 잡을테다..."
'으악!!!'
어머님 성격을 잘 아는 저는 걱정이 되었지요.
진짜 택배직원하고 싸움이라도 날 까봐요...
야채들은 시들시들...
생새우 갈아놓은 것이 행여나 변할까, 노심초사 마음 졸이면서 전화벨만 울리면 행여나 택배직원이 건 전화일까 반가워 달려가 받아보면 번번히
"고춧가루 도착했어?"
하고 물어보는 사람들이었지요.

저녁도 일찌감치 먹어치우고 우린 또 기다렸어요.
배추를 아침 9시 30분에 씻어놓았으니 이미 배추는 기운빠진 생쥐꼴을 하고 있었지요.
"띠리리릭...."
"아, 예? 어머어머... 택배회사라구여? 왜 이렇게 늦으셨어요?"
헤어졌던 애인한테서 만나자는 전화가 와도 이렇게 반갑진 않을거예요. 물건이 무척 많으니 내려와서 받아주면 좋겠다고 하더라구여.
얼른 내려갔지요.
진도의 친척형님은 고춧가루, 고추장, 된장, 굴, 싱싱한 횟감용병어까지 얼마나 푸짐하게 보내셨는지, 물건을 낑낑거리며 나르면서도 하나도 힘들지 않았어요.

"고춧가루 왔으니. 집합!!"
집으로 돌아갔던 김장요원들이 다시 속속 도착하고 여자들이 7명이 둘러앉아 하하,호호하며 배추속을 넣으니 2시간만에 110포기의 배추가 예쁘게 꽃단장을 하였지요.
얼큰한 김치를 몇번씩이나 맵다고 하면서도 또 싸서 먹고, 배추잎만 또 뜯어먹기도 하고, 차곡차곡 김치가 쌓여가는 즐거움은
산골짝에 다람쥐가 도토리랑 밤을 쌓아놓는 기분이었지요.
19층사시는 현신이 아빠는 김장을 어떻게 담그는가 궁금하다고 또 내려오셨지요.
"아이구, 어머님, 고춧가루가 도착해서 좋으시겠네요.."
그러자 시어머님은 맛있게 무친 김치를 둘둘 말아 현신아빠에게 건네주시겠지요?
"진짜, 맛있다...빛깔도 좋고, 고향 맛이네요."
"호호호호..."
어머님은 기분이 좋아지셔서 힘드신 줄도 모르고 김치를 담그셨어요.

김장을 끝내고 나니 10시 30분이 되었어요.
돼지고기 보쌈과 맥주, 김치를 놓고 뒷풀이를 하고, 돌아가는 손에마다 김치를 조금씩 담아주었어요.
얼마나 고마운 이웃들인지요.
가구점 문을 닫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쌍화탕까지 사들고 와서 도와준 일수엄마, 몸이 약한 웅식엄마, 씩씩한 우리의 천하장사 은비엄마, 싹싹하고 일잘하는 현신엄마, 그리고 전날 김장하셔서 힘드신데도 걸음해 주신 이모님... 정말 모두모두 감사해요.
덕분에 이제 한시름 덜었지요.

앞집에, 경비실에, 1106호 할머니댁에, 어머님 친구분 댁에 다 조금씩 갖다드리고 나서 완전히 김장은 막을 내렸어요.
우리 애들도 맨 입에 김치를 얼마나 잘 먹는지요.
"와, 참 맛있다... 매워, 물 줘, 또 김치 줘요."
아이들이 김치를 잘 먹자 어머님은 또 좋으신 모양이예요.

겨울이 지루하지 않은 이유는 바로 김장이 있게 때문인가 봐요.
이젠 땅 속에서 살 얼은 김치를 퍼다 먹는 즐거움은 없지만 대신 김치냉장고에서 잘 익혀진 김치를 먹을 일만 남았지요?
김장 끝내시고 어머님께서 몸살이 나실까봐 걱정이었는데, 다행히도 팔이 좀 아프실 뿐이신가 봐요.
어머님, 고생하셨어요.
건강하셔서 이렇게 맛있는 김장 오래오래 담가주세요.

우리김치 맛있기로 유명한데, 맛 보러 오세요.
지하철 타시고 신도림역에 내리셔서 전화하세요.
마중 나갈까여?

우리 몸엔, 역시 우리 음식, 신토불이가 최고여..

평안한 밤 되세여.
아직도 손에서 김치냄새가 폴폴...

안녕히 주무세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