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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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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부림스<9>-세기말의 누드쇼.


BY eheng 2001-03-06


숙경이.
그녀의 학창 시절을 기억하는가!
작지만 호리호리한 몸매에 흩날리던 긴 파마머리. 머리 숱이 없어서 바람 머리했다는 얘기도 있다. 개미 같던 그 허리 뽐내려고 짙은 색 청바지에 티 셔츠를 꼭 집어 넣어 입고 다녔다. 그 티셔츠 깃은 왜 그리 세우고 다녔던가! 나는 세워도 안 세워 지던데... 풀이라도 먹였나 보다. 청바지 아래로 내비치는 놀랄 정도로 번쩍이는 크링클 핑크색 하이힐. 학교에 도시락 싸 들고 오는 애도 숙경이었다.
하지만! 그 시절의 숙경이를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숙경이도 미경이 못지않게 널널 해졌다. 이젠 결코! 네버! 바지 속에 티셔츠 넣어서 못 입는다. 그랬다간 난리 난다.
사시사철 흐르는 땀에 불그죽죽한 얼굴은 항상 사우나에서 서너 시간 만에 막 나온 형국이다. 한겨울에도 부채 들고 다니며 훨훨 부쳐댄다. 잘 못 보면 신당동 점 집 아주매 같기도 하다.
작열하는 태양이 뉘엿뉘엿지는 작년 어느 여름 날.
우린 숙경이의 송별회를 위해 모였다. 웬 송별회냐구? 우라지게 영어 잘 하는 숙경의 남편이 멀쩡히 잘 다니던 은행을 때려치우고 만학의 꿈을 이루기 위해 유학을 간단다. 남편들 영어 못 한다고 구박만 할 일 아니다. 다행으로 알 일이다.
일산의 모 통돼지집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숙경이가 자기가 잘 아는 단골집이 있다고 해서 갔더니 쇠고기 집이더라. 맨 날 돈 없어서 아이들 학습지도 못 시킨다고, 파마도 못하고 산다고, 생활비 아끼려고 시골의 시댁으로 내려간다고 앓는 소리 하더니만 허구 헌날 쇠고기 등심만 먹고 다닌 것이다. 배신감에 몸이 떨렸다.
경옥이네, 노처녀 옥자(얜 아무 사건 없이 꼭 껴서 밥 한끼 걸지게 얻어 먹는다. 일종의 그림자, 어둠의 세력이다.), 숙경이네, 그리고 나와 내 자식들. 그렇게 13명이었다.
잠시, 그 날의 패션에 대해 언급하겠다. 말 안하고 지나가기엔 너무나 묘연한 행색이었기에… 숙경이, 화려한 꽃가라 통치마 홈드레스를 입었다. 워찌나 꽃이 많던지 보기만 해도 어지럼증이 생긴다. 그 치마로 비겁하게 위장하려고 하지만 우리의 눈은 속일 수 없다. 우린 투시 능력이 있는 것이다. 쌀집 아줌마 같은 팔뚝을 가려보겠다고 그 위에 손뜨게로 짠 망사 같은 가디건을 걸쳤다.(아줌마들의 영원한 패션, 입는다고 가려지지도 않는, 그러나 입지 않으면 몹시 불안한.) 경옥이, 민소매 레이온 파란 원피스를 입었다. 그 생경한 파란색을 어디에 비교해야 하는가! 아! 고흐의 <오베르 교회>에 나오는 하늘색. 그런 특이한 파란색 원피스였다. 하지만 원피스까진 그래도 참을 수 있다. 긴 다리 아래로 우리의 시선을 잡아 끄는 것이 있었으니... 반짝이 스팡클이 온 통 다다닥 붙어있는 파란색 하이힐 슬리퍼! 너무나 엄청나서 말이 안 나온다. 저게 어디 여염집 아낙의 신발이던가? 그냥 두말이 필요 없는 무대슈즈다. 색깔을 맞추려는 노력은 가상하나 지나가는 행인들 자지러 들면서 한번씩 쳐다본다. 파마 머리 찝어 올린 그 찝게 핀은 또 어땠는가? 인조 다이아가 알알이 박혀있는 그 핀. 침침한 가로등 아래서도 그 빛이 십리를 간다. 시골뜨기 옥자, 베이지색 원피스는 무난했다. 그러나!!! 몇일 동안 감지 않은 머리 캄푸라치하려고 뒤집어 쓴 챙 달린 모자! 모자는 얼굴이 작은 사람에게 어울린다는 패션의 기본선을 무참히 짖밟았던 것이다. 그럼, 나는 어땠는가? 까만색 민소매 원피스에 까만 슬리퍼. 난 의상으로 승부 걸지 않는다. 그저 가만있어도 우러나오는 내면의 그 무엇으로(이런 걸 뭐 지성이라 하든가?) 내 자신을 장식한다. 내츄럴리…

아이들도 보통은 아니었다. 분당서부터 오느라 땀에 쩔고, 아이스크림 국물에 꼬죄죄한 홍준이와 주영이의 넌링구, 그대로 양아치 자식이었고, 엄마와는 달리 배배 말라 때 국물 흐르고 아토피 피부라 군데군데 뻘겋게 덧난 상처의 숙경이 아이들은 불쌍해 보였다. 우리집 아이들은 가뜩이나 까만데 여름 날 뛰노느라 파주 아이 마냥 시골스러웠다. 끼니 때도 아닌데 밥 달라고 아우성이다. 굶어죽은 귀신모양...

우루루 몰려가 자리잡고 숯불 피워 일단 쇠고기 등심부터 구어 먹기 시작했다. 그러나 끝이 안나 돼지고기로 마무리했다. 그거로도 부족해 밥과 면으로 배 채웠다. 어른 아이 13명이 가서 고기15인분에 밥으로 승부했다. 경옥이네 아이들과 우리 아이들 허겁지겁 먹느라 덜 익은 고기도 중뿔나게 먹고 숙경이 식성도 공포스러웠다. 계산은 재벌이 했다. 생각보다 따블로 나왔는지 계산하면서 자꾸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그 꼴 보기 민망해 서둘러 나왔다.
그때 숙경의 남편이 왔다. 남편 역시 사우나에서 막 나온 사람 같다. 왜 안 그렇겠는가? 더운 여름날 토플 공부한답시고 도서관에서 아침부터 공부해보라. 그대로 사우나요, 익은 계란이요, 보쌈 덩어리인 것이다. 땀에 퉁퉁 불어 그대로 밀면 때 나온다. 앉아서 3000원 번 것이다.
숙경이 남편은 왜 왔는가? 계산을 해 줄 것도 아니면서.
시간이 된 것이다. 우리의 가무 시간이. 그래서 아이들 데리러 온 것이다. 홀가분히,한갓지게 놀라고. 본 받아야 할 것이다. 몸부림스의 남편들은. 기회가 주어 질 때마다 아내의 몸부림을 이해하고 적극적으로 몸부림 칠 수 있게 내조를 해 줘야 하는 것이다.
숙경이 신랑, 멋쟁이! 화이팅이다.
가무를 하러 걸어가고 있는데 앞서서 걷던 경옥이 갑자기 번쩍이는 구두 굽을 땅땅땅 울리면서 달려 가더니 길가의 행상 아저씨한데 파 한단을 넙적 산다. 이 야심한 밤에 파는 왜? 더럭 겁이 났다. 이젠 봉으로 안 되어 파까지? 파가 뭣에 쓰이던가? 강력한 최음제런가? 이젠 우리 오늘 그대로 열락의 밤을 맞는구나! 광란의 밤이구나!

"파는 뭣에 쓰려고?”조심스럽게 묻는다.
"곰국 한 들통 고아 놨는데 파가 없어서. 일산이 싸긴 싸다. 500원이다.”
$#%@#$%^!

그렇다! 우리 몸부림스, 음주가무 중에도 가족들 거둬 먹일 생각에 한시도 어설픈 생각 못한다. 알뜰한 살림솜씨 어디서건 빛난다.
아이들은 우리집에 과자를 미끼로 몰아넣고 앗싸 노래방에 갔다. 근데 숙경이 보컬 사우드가 없으면 안 된다고 우겨서 그 옆집 오디션 노래방으로 갔다. 방은 큰 걸로 잡았지만 더운 여름날 에어컨이 안 되는 것이다. 벽에 붙어 있는 선풍기에서 더운 바람이 훅훅 불고 있었다. 들어가자 마자 숙경이 앞으로 나가더니 마이크 줄을 손에 두 번 감아 쥔다. 많이 해 본 가닥이다. 그러더니 남행열차 틀어놓고 관광버스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는 거다. 숙경이 분명 관광버스 타 봤다. 안 그러면 저럴 수는 없는 거다.
앗싸! 앗싸! 꽃가라 통치마 붕붕 뜬다. 숙경이도 같이 돌아간다. 마이크 돌릴 시간도 안 주고 혼자서 제 흥에 겨워 서너 곡을 연달아 부르더니 갑자기!
갑자기, 너무나 순식간에 그 일은 일어났다.
손뜨게 가디건을 냅다 벗어 던진다. 그러더니 통 치마 들치고 뭔가를 벗기 시작한다.
으악! 누드쇼닷! 세기말의 누드쇼가 벌어지는 구나.
숙경이 보기보다 쎄다. 경옥이보다 한 술 더 뜬다. 숙경이 여지없이 벗어 내 던진 것은?......
누런 속곳. 할마이들이나 입을 만한 커다란 삼베 속곳이다.

"아휴~ 더워~ 미쳐부러.”
훌러덩 벗어 던지고는 다시 노랠 부른다. 휴우~! 그만하길 천만다행이다. 그것으로 숙경이의 누드쇼는 끝났지만 그날 우리는 숙경의 취향대로 세월따라 노래따라 분위기로 갔다. 경옥이 그날 따라 안 되는 영어로 팝송 부르다가 망신당했다. 경옥아, 너 비틀즈 노래 부르다 진짜 비틀어진다. 그냥 평소대로 김수희, 심수봉 노래 불러라. 난 오랜만에 남진의 <그대여 변치 마오>불렀다가 엄청 야유 받았다. 그냥 평소대로 <순아, 단둘이 살자>부르기로 맹세했다. 우린 모이면 일단 닐리리 맘보로 시작해서 밀리리 맘보로 끝장을 낸다. 대학 때도 안 짜던 스크럼 짜고 닐리리 맘보 부르며 영원한 결속을 다짐했다.
머리부터 발 끝까지 흐르는 땀을 주체할 수 없어서 집으로 돌아 왔더니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몸부림을 쳐 놓았더다. 아이스크림 사 달라고 악을 써서 오밤중에 아이스크림 사다 멕여서 재웠다.
그 여름 밤은 그렇게 저물어 갔다.

이제 숙경이 갔다. 숙경이 없는 일산은 허무하기 짝이 없다. 시도 때도 없이 전화해서 쓸데 없는 것 물어 보더니 이젠 쓸쓸하기만 하다. 시골서 막 짜온 참기름이라며, 토종 깨라며, 시댁에서 가져온 고춧가루라며 봉지봉지 싸 주던 친정 언니 같던 숙경아, 미국 가서 주소 띄워라. 우리 몸부림스, 매일 메일한다. 약속한다.
몸부림스 하나 떼어 보내며 찢어지는 이 마음 누가 알랴...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