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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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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부림스<5>-한 밤중의 전화테러


BY eheng 2001-03-04

그 사건의 전말은 이러하다.
재희가 남편 따라 유학길에 오른다. 집안에서 뜯어말리는 결혼을 고집하고 사랑 하나만으로 살 수 있다며 몸부림치며 결혼하더니 비행기 타고 유학을 간다. 영화에서, 혹은 엽서에서 본 것 같은 멋진 고건물에서 장바구니에 바게트를 넣고 비 오는 거리를 걸어다니며... 낭만적인 생활을 연상했던 재희의 꿈은 파리에 도착하니 완죤히 산산조각이 났다. 왜 아니겠는가? 둘이 누울 수도 없는 작은 침대 하나가 달랑인 원룸에 공동 화장실, 그나마도 생활비가 끊겨서 하루하루 살기에도 힘들었던 것이다. 블란서에서는 밥으로 먹는 바게트 빵도 배불리 못 먹었다는 후일담이 있다. 책 한 권 팔아 하루 빵 사먹고, 다음날 또 책 팔아 연명했다는 소문도 들었다. 하여간... 누가 유학 가며 호의호식을 바랬던가? 일찌감치 각오는 하였으나 눈앞의 현실은 언제나 혹독하고 매정한 것이다. 어찌 어찌 살았는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시어머니도 며느리도 모를 일이다. 그러던 중...
향수병에 시달리고, 친구들 보고 싶어 밤마다 눈물로 베갯잇을 적시는데 시댁에서 한 번 다녀가라고 비행기표를 보냈다. 그 징글맞은 비행기표!!! 그것이 문제였다.
재희가 두살바기 어린 아들 데리고 한국에 오자마자 비행기표 보낸 유세가 대단했다. 이리 와라 저리 가라~ 비행기표 받은 죄로 이리 저리 끌려 다니다가 겨우 친정에 왔겠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그리운 동창들을 만나서 오랜만에 회포를 풀며 밤이 늦도록 고생 보따리를 풀어놓고 있는데...

"따르릉..."
전화를 받으니 재희의 시누이가 아닌가? 이 밤중에 웬 일? 받아보니 시댁쪽으로 무슨 모임에 참가하라는 것이다. 남편도 없이 어린 아들 데리고 돌아다니는 것도 고역인데 잘 알지도 못하는 시댁 관계자들의 모임에 간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다. 하지만 예의 바른 재희는 단정하게 거절한다. 다시 갈 수 없는 정황들을 웃으며 설명한다. 그 다음엔 하소연한다. 삐죽거리며 울먹인다. 조금 언성을 높인다. 소리를 꽥 지른다. 전화통을 집어 던진다.

시누이 말인즉은 비행기표 붙여줬음 그만이지 왜 말을 안 듣느냐는 것이다. 그 쥑일 놈의 비행기표!
언감생심, 자다가 봉창 두들기고,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한밤에 친구 네로 전화테러를 한다.
경옥이, 영선이 아무리 배암 장사하며 몸부림쳐도 재희의 몸부림만 했을까 보냐. 미경이 혜경이 아이들 재워놓고 100% 부킹 되는 캬바레 가서 괴성 질렀어도 재희 울음소리만 했을까 보냐. 정말 발작을 했다. 같이 있던 친구들도 거품 물었다. 며느리는 사람이 아니던가, 이리 오라면 이리 오고 저리 가라면 저리 가는 김매는 황소던가. 하물며 황소도 이따금씩 등 쓸어주고 여물 쒀주고 그늘에서 쉬게 한다. 타향에서 그리도 지치고 병들어(내가 보기엔 그때 재희 병들었었다. 팅팅 누렇게 떠서 가뜩이나 똥그란 얼굴 눕혀놓은 계란되어 만성신부전증 환자처럼 부석거렸다.) 모처럼 고향에 와서 잠시 친정에 왔는데 그새를 못 견뎌 테러를 하다니! 천인공로할 일이다. 밤새도록 씨근덕대어도 그 비행기표 때문에 가슴만 끙끙 앓았다.

우리 몸부림스 며느리들이여!
우리가 비록 몸뚱이 하나로 사는 몸부림스지만 그래도 엄연한 인간이다. 인간답게 살기위해서, 그러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이다. 그러니 몸뚱아리 없는 인간들이여! 그대들만 돌을 던져라!
재희 울다가 지쳐서 잠이 들고 그 더운 여름날에 베란다 문을 열어두니, 휘엉청 무심한 달빛만 내 가슴을 후리는구나!
정말 잠 못 이루는 밤이었다. 자려고 돌아누운 재희도 어찌 잠을 잤겠는가! 마음 속으로 열두 번 씩 그 비행기표 갈갈이 찢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재희 비행기표 얘기만 하면 풍 걸린 사람마냥 부들부들 떤다. 없으면 없었지 차라리 대서양 혼자서 헤엄쳐 올 양이다.

하지만 이런 재희의 테러사건. 어찌 혼자만의 것이겠는가! 나도 너도 수없이 당했다. 말을 하자니 길어서 그렇지...
내친 김에 나도 한다. 들어 봤는가.<한겨울 김장사건>이라고. 6년쯤 전의 일이다. 시도 때도 없이 아이들을 맡기는 시누이, 이번엔 외국에 가며 아이 셋을 봐달라고 해서 처음으로 거절했다. 그랬더니 시어머니 전화하셔서

"이번 김장 네가 혼자 다 한다. 30포기다. 알타리는 덤이다!"하시는 거다.
차라리 애들 봐 줄 껄껄껄... 후회하면서 배추 사다 30포기 김장했다. 그리고 상납했다. 지금 내가 일 잘하는 이유 따로 있다. 이런 지옥 훈련들이 지금의 나로 단련시킨 것이다.

시어머니가 며느리 구박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재밌는 이론이 있다. 사회생물학이라는 조금은 생소한 학문에서는 인간의 유전자가 지속적으로 자기의 유전자를 퍼뜨리기 위한 매개체로 인간의 몸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영장류 중에 유일하게 배란기가 있고 폐경기가 있는 건 인간 뿐인데 여성이 폐경기에 이르면 더 이상 자신의 유전자를 퍼뜨릴 수 없어서 다음 세대에 기대를 한다. 여자가 폐경기쯤 될 나이가 마치 맞게 아들을 결혼시킬 나이고 자식을 통해서만 자신의 유전자가 유전될 수 있기 때문에 아들이 바람 피기를, 아들이 딴 여자를 만나서 자신의 유전자를 더 많이 퍼뜨리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러려면 지금의 며느리만으로 부족하다. 빨리 며느리를 ?아내야 새 며느리를 들이고 그래서 더 많은 자손을 생산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것이 그 유명한 <이기적인 유전자>의 음모라는 것이다. 유전자는 교묘히, 자기기만을 이용하여 자신도 모르는 사이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구박하게 한다. 필연적인 유전자 전쟁이라는 것이다.(오늘 워째 학문 된다!) 어찌 되었건 유전자의 음모건 아니건 시어머니의 며느리 괴롭히기는 인류역사상 계속되어온 비참한 여성의 역사이다.
우린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가!
온갖 공갈과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용기가 있는가!

있다!
어떻게?
몸부림치면 된다.
맞다!
테러가 분분한 이 세상을 몸부림치며 살다 보면 총알도 비껴간다.
이젠 한밤중 테러 전화나, 여름날의 불 갈비, 한겨울 김장도 무섭지 않다. 부당한 것을 부당하다고 한 번 세차게 몸부림치면 된다. 며느리들이여! 몸부림을 치자!

재희가 다시 파리로 돌아가고 하릴없이 가을이 왔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