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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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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부림스<2>-무조건 이겨야 한다.


BY eheng 2001-03-03


그건...
그래도 빈 손 들고 오지 않은 친구들의 뇌물이 있었기 때문. 대전에서부터 기어 올라온 영선이가 사온 케이크. 나눠먹긴 좀 작았지만 진짜 맛있었다. 집들이도 아닌데 웬 금장 액자, 하지만 숙경아, 그것도 고마웠다. 그리고 세 개들은 크리넥스팩, 귤 한 봉다리...
다 살림에 요긴하게 썼다.
하지만 초행길이라고, 가게가 어딘지 모른다고, 그냥 와서 비빔밥은 두 그릇 먹고 설거지도 안 한 너그들 명단. 나, 아직도 가지고 있다. 각오해라.
하지만 꼭 그래서만 마음이 그득한 건 아니었다. 뿔뿔이 헤어져 살다가도, 소식 한 장 없이 몇 년을 그러고 살다가도 비빔밥 한 그릇에 혹해서 저 멀리 분당서, 대전서, 안산서 헉헉대며 찾아온 너희들이 좋아서 였다. 이불 속에서 내내 웃었다. 이건 진짜다.

우리 몸부림스.
단순하고 무식하여 용감한 아줌마의 애칭이다. 자꾸 경옥이 얘기를 하게 되는데 지리학상 안 그럴 수가 없다. 경옥이 시댁이 우리집 바로 앞이어서 한참 애들이 어려서 키우기 힘들 적에 자주 시댁에 와서 치댔고,(애들이 어지간히 크니까 이젠 절대로 안 온다. 요즘은 경옥이 보기가 하늘의 별붙이기다.) 시어머니 눈치 보여 우리집에 와서 맨 날 밥 먹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사연이 많은 거다.
그날도 갑자기 경옥이네 부대가 몰려왔다. 연락 없이 왔기 때문에 밥통에 밥이 한 그릇밖에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라면과 우동을 끓여 주려고 물었다.
"우동 끓일까, 라면 끓일까?"
"둘 다 먹자."
두 번 생각도 않하고 둘 다 주문했다. 우동 한 그릇, 라면 한 그릇 푸짐하게 끓여서 내왔다. 이상하게 아이들이 끼적거리며 안 먹자 경옥이 이게 웬 경사냐 싶어 남은 우동 먹고, 라면 먹고 그것도 모자라 밥 한 그릇 몽땅 말아 먹었다. 김치는 두 보시기 먹었다. 이 나이 되면 밥심으로 사는 거라며. 그리고 당근 케??또 먹었다. 과일을 깎아오니 늦게 달려든 주영(경옥이 딸)이가 징징 울면서 두 개 남은 사과를 보고 네 개 달라고 찡얼거린다. 경옥이 눈 크게 뜨고 무섭게 야단친다.
"그냥 먹어. 그러길래 남들 먹을 때 더 빨리 먹어야지. 그래야 많이 먹지. 뭐든지 이겨야지!"
그래도 주영는 찡얼거린다. 하는 수 없이 남은 사과 두 개를 반씩 잘라 네 개를 만들어 줬다. 그제서야 주영는 흐믓하게 웃으며 먹는다. 그 옆에서 제 먹을 거 다 먹은 내 딸이 군침 삼키며 말한다.
"난 그래도 다섯 개 먹었는데..."
단순함이 이렇게 유전되던가! 역시 몸부림스의 딸들이다.

그 당시 너무나 헌신적으로 젖 먹여 자식을 키우던 경옥이 과로와 영양실조로 폐렴에 걸려 시댁에서 요양(?)하며 동네 병원(김내과의원)에 다녔는데 하루는 오더니 그 김내과 닥터가 괜찮다고 하더라. 음~ 아무리 남자구경을 못해도 그렇지,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다 해도 그렇지, 가로 세로 깍두기 같은 닥터를!
내가 바로 옆 이치과 여의사가 그의 부인이라고 하자, 질투의 눈길이 번쩍였는데 그 다음날, 저만치부터 덥적덥적 걸어오더니 다짜고짜 외친다.
"내가 이겼어."
"뭘?"
"그 이치과 여의사 내가 가서 봤는데 나보다 안 예뻐. 그러니까 내가 이겼어."
할 말이 없다. 완전히 졌다.
승리의 기쁨이 심신의 안정을 가져 다 줬는지 그 후 회복이 빨라서 완전히 건강해진 몸으로 경옥이는 아이 둘을 데리고 총총히 집으로 되돌아 갔다.
그래. 니가 이겼다!!

홀 시어머니와 젊은 과부가 살고 있었다.
어느 여름날,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 오더니 억수같이 장대비가 내린다. 장대비 소리에 낮잠자던 며느리 황급히 뛰어나와 간장 독 뚜껑을 덮는다. 빨래 줄에 걸린 옷들도 후다닥 걷으며 문득 원망스레 찌푸린 하늘을 째린다. 한 섞인 소리로 중얼거린다.
"에고!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이렇게 장대비만 내리시지 말고 장대 같은 남자라도 한 명 뚝 내려주시지..."
귀밝은 홀 시어미 그 말을 듣고 노발대발이다.
"우라질X, 기왕이면 두 명이라고 하면 안 되나, 같은 팔자에..."
맞다. 장대비가 내리면 우리 몸부림스, 그 심연에 잠자고 있는 본능이 기지개를 켠다. 장대비가 우리를 두드리고 깨우는 것이다. 얼른 일어나라고.
사 년 전, 더운 여름 밤, 그날에도 억수 같은 장대비가 심상치 않게 내리고 있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