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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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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그 님은 나에게 다가 올수 있을까요?-


BY 박라일락 2001-01-07

어둠이 아직 깔려있는 새벽의 창 밖은
겨울비가 주럭 주럭 하염없이 옵니다.
새벽 일기예보 방송을 들으니
동해 전 해상에는 폭풍주의보라고 하는군요.
요사이 큰 어획고가 없으니 목숨 걸고
어부들이 출항하지 않을 것은 뻔한 일이라서
이렇게 새벽부터 컴 앞에 앉았습니다.

송사장님!
아무리 이틀 밤을 곰곰이 생각을 해도
난 당신을 이해 할 수가 없구료.
당신 참 모질고 독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만난지가 언제더라?
89년도 가을이었지요?
한잔의 커피향으로 피곤한
오후 한 나절을 만끽하고 있는 나에게
원래 거래가 있는 영동횟집 김사장님과 송사장님이
우리 집에 날 뵈옵겠다고 찾아 왔지요.
큰 횟집을 오픈 했는데 활어구입을 좀 부탁하고 싶다고.
우리의 인연은 여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가까워 졌고 가족끼리도 얼마나 친하게 지냈습니까?
송사장님 부인 또한 구입해준 물건이 마음에 던다면서
늘 저에게 고맙다고 분에 넘치는 선물을 보내주시고.....
더더욱 고마움은 송사장님이 대구에 계시기에
나의 나이 어린 자식들이
대구에서 힘들게 공부한다면서 물적으로 심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셨지요.
언제나 내가 자식들에게 보낼 모던 생활 품을
한번도 싫다는 내색 보이지 않고 잘 전달 해주었지요.
특히 아주머님께서 베풀어 준 그 은혜 지금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갚지를 못해서 아직도 무거운 짐으로 남아 있지요.
또한 누님이 경영하시는 그 큰 왜식 집에 영덕 대게를
납품하도록 힘써주심은 나에게 경제적으로 너무나
큰 도움이었습니다.
그 당시 우리아이들 아빠가 오랜 병고 끝에 어린 자식들과
부채만 남기고 간 여운의 그림자가 남아 있었던
힘 던 상황에서 송사장님의 배려는 우리 가족에게는
너무나 큰 은혜였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강 건너 변하였고요, 하시는 식당 업이
여의치 않다고 다른 업종으로 변경하시면서
우리의 사이는 한 다리를 건너고 있었답니다.
아마 한 3년 전의 일인가 생각됩니다.
멀리 있으면 정도 멀어진다고 했나요?
우리는 자주 부딪치지 않았기에 종종 전화로 안부만 묻었고
내가 대구에 가서 송사장님 가게로 가면서 우리의 정이
아직 식지 않았음을 확인했지요.
그러나 자식놈들은 서로가 어울리면서 잘 지내고 있더라고요.
송사장님과 나는 고객으로 만나서 인정미가 베어 있는
인간의 고리를 엮어 왔다고 지금도 자부합니다.

그런데 대구에 간 그 날.
솔직히 말해서 시간이 없었지요.
모처럼 촌 아낙이 도시에 한번 출타하면 너무나 소관이 많습니다.
토끼 같은 자식새끼도 만나야 하고,
25년이란 긴 세월을 살은 온 내 고향에 만나야 할 친구들도
억수로 많지요.
그래서 언제나 촌 아낙은 큰 백화점 구경
한 번 하지 못하고 오는 날이 허다합니다.
그런데 왜 그리 그 날은 송사장님 가족들이 보고 싶은지
친구들과 헤어지면서 여식에게 가기 전에 님의 가게로
차 머리를 돌렸답니다.
여전히 듣던 데로 님의 가게에는 손님들이 많아서
나의 일처럼 기분이 좋았습니다.
나를 반겨 줄 님은 보이지 않았고,
아주머님이 힘 없는 웃음으로 날 반겼습니다.
그리고 가게 분위기는 왜 그리 무겁습니까?
좀은 이상하다 생각했지만 나는 여의치 않고
큰 소리로 "아하! 이 집은 언제나 때 부자로 장사가
잘 되고 있구먼" 하고 농담 반 진담으로 우시게 소리를 했지요.
아주머니는 반갑게 나를 붙잡으면서 두 눈에 흐르는 눈물을
감당하지 못하여 엉엉 소리를 내었고.
난 어쩐 이유도 모르고 당황하여 멍하니 바라만 보았고.
아~~~~~그런데 세상에 이런 일이 또 있습니까?
송사장님!
정말 당신은 너무합니다.
잔인하시고 무정합니다.
이 어처구니없는 이런 상황에서
나에게 왜 알리지 못하게 했습니까?
이렇게 큰 고통으로 3개월이 넘도록 生과死의 갈림길에서
허덕이면서 나에게만 비밀로 하라고 했습니까?
님이 서울 병원에서 마지막으로 위암으로 힘들겠다고
하면서 최후에 수술로 마감을 했다면서요.
그리고 지금은 항암치료로 투병중이란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기절 할 번했습니다.
아주머니와 나는 두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울었고,
나의 가슴 아픔이 님들의 가족에게 비교하리요 만은
그래도 난 그 날 운전하고 집으로 오는 길이 너무나 아득하였습니다.

아마 님은 고향이 그리웠나 보지요.
요양삼아 고향으로 내려갔다고요.
아주머님은 날 보고 시골 전화번호를 주시면서
집에 가서 마음가라 않히고 전화하면서
왜 너무 힘들어하면서도 말하지 않은
이유를 물어보라고 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나는 님의 아픔이 슬퍼서 울었고,
또 나에게 숨긴 이유가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집에 돌아 온 나는 즉시 님에게 전화로다가 갔지요.
너무나 힘없이 받는 님의 목소리는 나를 통곡하게 했고.
빗 발 치는 원성으로 나는 님이 환자라는 것도 망각 한 체
왜? 나만 빼고 다른 사람들은 다 알아서 서울로 갔는데 라고
투정과 원망을 했지요.
그런데 님의 대답은 나를 너무 황당하게 하였습니다.
-원래 좋아하는 사람 앞에 초라한 모습을 보이게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니 내가 당신 앞에 예전처럼 건강한 모습으로
나타날 때까지 찾지 말고 잊어주면 언젠가 다가 갈 것이라고-
송사장님!
아직도 어리석고 무딘 나는 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가 고객으로 만났고,
신뢰와 우정으로 연결 고리를 매듭지었지요.
그 이상의 사랑도 그이하의 우정도
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사옵니다.
그런데 님이 나를 거부하시고 만나기를 꺼려하심은
무슨 이유입니까?
어제 저녁 우리 가족들은 온통 님의 이야기로 우울해 하였고
아들놈은 어서 속히 찾아뵈워야 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라고
이 어미를 책망하고 있습니다.
송사장님!
이 여인은 어찌 하오리까?

아 컴에서 만난 사랑하는 아우가 큰 종합병원에서
수간호사님으로 있기에 님의 병에 대하여 물어봤더니
상세하게 답 글을 주었습니다.
일단 수술을 했으면 호의적으로 생각 할 수도 있다고 하네요.
수술 하다가 포기도 많이 하는데 수술했다는 그 사실만도
희망이 있을 수 있다고 지 셩을 위로 했주었습니다.
그러나 항암 치료는 너무 힘든다고 하니 걱정이 앞 섭니다.

송사장님!
분명 님은 나에게 말했습니다.
건강한 몸으로 나에게다가 갈 거라고.....
나 역시 님을 믿고 싶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님은
남에게 베풀면서 모범적인 생활을 하심을 보아 왔기에
하느님이 님을 데리고 가시기에는
아직은 너무 일찍은 나이라고 할겁니다.
오늘내일 서울로 항암치료 가신다고 하오니
잘 치료받고 오십시오.
대구로 오시는 날 아주머니가 저에게 전화 주신다고
하니 곧 찾아뵙겠습니다.
우리 그 때 만나서 마음에 두었던 모던 이야기를 주고받읍시다.
꼭 건강해서 님이 나에게 다가올 수 있는
그 날이 있을 거라고 믿사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