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엔 남편이 장사하던 곳 상가번영회 사람들과 송년회 모임이 있어서 시내를 다녀왔어요.
오랫만에 번듯한 장소엘 나가려고 하니 입고나갈 옷이 있어야지요.
큰 애 의견처럼 그냥 평상시 차림으로 (오리털잠바, 티셔츠, 청바지)나가려고 하니 왠지 그건 또 아닌 것 같았지요.
장소가 일단 장소고, 부부동반 모임인데 그럴 경우 여자분들 의상에 신경 많이 쓰고 나오시잖아요.
궁리 끝에 윗층에 친하게 지내는 현신엄마에게서 검정색 롱코트를 빌렸지요.
거기에 어울리게 진주목걸이까지 빌려준다고 하였지만 모파상의 진주목걸이가 생각나서요.....
'ㅎㄹ각'이라고 하는 중국음식점이었는데, 4-5층 되는 건물이 모두 음식점이고 천정도 어찌나 높고 예쁜 샹델리가 달려있는지 들어서는 순간 가슴이 탁 트이는 듯한 느낌이 있었지요.
그간 봉사활동이나 단합대회등으로 얼굴을 익힌 여러분들이 반갑게 맞아주었어요.
구청에서, 동사무소에서 관련되시는 분들이 나와 격려 말씀을 해 주시고는 얼른 돌아가시고 그 다음 우리끼리 레크리에이션 시간이 있었어요.
레크리에이션 강사가 부부 몇 팀을 불러내 이것저것 질문을 하고 내년엔 아내에게, 혹은 남편에게 바라는 점을 얘기하라고 했지요.
우연찮게 저희가 불려나갔어요.
젊은 386세대를 대표해서 3팀이 함께 무대에 서있는데, 내년에 남편과 아내에게 바라는 점을 배우자의 얼굴을 쳐다보며 진지하게 얘기하라고 시키는 거예요.
이전의 다른 팀들은 뭐,
"내년에도 올해처럼 뜨거운 밤이 되어 주세요..."
"너무 지나치게 요구하지 마세요."
"술 좀 그만 먹어요..."
였었는데,
저희는 좀 더 젊은 세대라 그런지 그런 말은 나오지 않았지요.
"그동안도 잘 해 왔으니 앞으로 열심히 성실하게 가정을 끌어가 주었으면 좋겠네요..."
"이 자리를 마련해 주신 회장님과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저희 부부 옆에 서 있던 부부는 이렇게 서로 말했지요.
드디어 저희 차례!
사회자의 마이크를 넘겨받는 남편이 저를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지요.
"본의 아닌 실직자 생활을 9개월 넘게 하고 있는데, 집안 일이 그렇게 많고 힘든지 처음 알았습니다. 그동안 잘 도와주지 못하고 짜증만 내고 했었는데, 앞으론 잘 해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제가 올해 돈을 좀 많이 까먹었습니다. 그점 무척 미안하게 생각하고 앞으로 하게 되는 일 정말 열심히 해 보려고 합니다."
남편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던 제 눈에 금방 눈물이 핑~~ 돌았어요.
"이 세상에 태어나 당신을 만난 일이 가장 행복하고 즐거워요.
앞으로 열심히...."
제 목소리는 울음이 섞여 나왔기 때문에 더 이상 뒤를 이을 수가 없었지요.
상상도 못 한 일이었어요.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주책스럽게도 말을 하다말고 눈물이 뚝 떨어지다니....
부끄러워 혼났지요.
쳐다본 남편의 눈시울도 붉어진 것 같았어요.
사회자가 마이크를 얼른 받아
"무척 정이 많으신 부부인가봐요. 다 함께 격려의 박수를...."
장내에 참석한 여러사람들이 박수를 쳐주었어요.
자리에 돌아와 앉자 이사람 저사람이 와서 잔에 맥주를 따라주며 참 좋아 보인다고 하셨어요.
나이가 들어가면 눈물도 많아지나요?
아님 나이가 들어가면 마음이 약해지나요?
남편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솔직하고 당당하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제게 잘해주겠다고 하는 그 말 한마디에 그만 감격해 버린 제 모습이 너무 바보같아 쥐구멍으로 숨고싶었지만....
거기에 참석하신 분들은 모두 자영업자들이에요.
소규모의 조그만 가게에서부터, 제법 큰 건물에서 장사하시는 분들까지 어떻게 생각하면 빈부의 차이가 있어서 함께 어울리기 어려울 것 같기도 하지만, 같은 지역에서 함께 생활해 나간다는 공통분모를 갖고 서로 이해하고 격려하고 감싸주는 모습이 정말 따뜻한 사람들이었지요.
그리고 제가 염려했던 것 처럼 그렇게 의리번쩍!!하게 옷을 입으신 분도 없었구요.
회장님 사모님만 단정한 한복차림을 하셨어요.
한 해를 잘 마무리하고 다가오는 새해엔 더 열심히, 성실하게, 모든 가정에 축복이 가득하길 기원하며 함께 건배를 했지요.
헤어질 땐 새해 복 많이 받으시란 인사도 잊지 않구요.
이제 딱 삼일 남았군요.
이렇게 아쉽게 2000년이 끝나가고 또 한 해가 밝아오겠지요?
인생은 진짜 한바탕 꿈과 같은 지도 모르겠어요.
저희 부부가 늦을 것 같아 아이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마치시고, 집안 청소도 말끔히 끝내 놓으시고 운동을 다녀오시는 시어머님께 한 편은 죄송한 생각도 들었어요.
"힘드신데 방청소는 하시지 말지 그러셨어요?"
"뭐 하러 너 올때까정 기다리냐? 그냥 했으니께 걱정 말어..."
외출할 때 당신이 즐겨하시는 목도리를 직접 예쁘게 매어주시던 시어머님께 다시 감사드리며...
딱 삼일 남은 2000년, 못다한 일이 행여 있는지, 누군가에게 섭섭하게, 속상하게 그렇게 지낸 것이 있다면 마저 훌훌 털고 정리하는 삼일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되돌아 올 수 없는 시간들만이 차곡차곡 쌓여나갑니다.
모두 평안한 저녁 되시고요,
안녕히 주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