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이시여!
또 다시 가을입니다.
뒤 돌아볼 겨를 없이 그저 앞만 보고 달려왔습니다.
이제 시월의 막바지에 서서 자그마한 여유를 찾으렵니다.
숨가뿐 일상에서 벗어나 사색의 즐거움을 맛보렵니다.
어린시절 고운 단풍잎 모아 책갈피에 끼우던 그 순수로 돌아가
보렵니다.
석양무렵 산골 마을에 울려 퍼지던 교회당 종소리가 들립니다.
따뜻한 사람들이 모여사는 작은 동네가 보입니다. 키를 뒤집어 쓰고
소금을 얻으러 가는 조그마한 계집아이가 보입니다.
그 아이는 이제 그때 자기 보다도 더 큰 아들을 둔 여인이 되었지요.
20층 꼭대기에서 내려다 본 세상은 온통 화려합니다.
고개를 치켜세운 잘난체 하는 사람들로 꼭 차 있습니다.
저마다 즐거움을 쫓는 무리들로 가득합니다. 컴퓨터 앞에서 밤을
지새우며 쾌락을 쫓습니다. 왜 우리네들은 끝없이 달음박질만 치는
걸까요? 남보다 앞서려고 옆도 뒤도 보지 못합니다.
이제 누가 옆에 있는지 뒤에 있는지 살필 수 있는 여유를
가져야겠습니다.
님이시여!
이 가을에 가슴아픈 사람들 가슴시린 사람들을 당신의 넓은 품으로
따뜻이 감싸주소서. 이 시간에도 거리를 방황하는 사람들.
일거리가 없어 길에서 추운 밤을 맞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희망을 주시고 오는 겨울이 두렵지 않게 하소서.
움츠린 오늘 밤이 내일은 가슴펴고 살 수 있는 날 되게 하시고
사랑할 줄 알고 사랑도 베풀줄 아는 사람 되게 하소서.
당신을 아는 사람들 되게 하소서.
1998년 가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