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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왕건 드라마를 보고


BY 김미정 2000-07-25

요즘 태조 왕건 드라마 보시나요
저는 고려왕조 성립에 대하여 첨 접해보는 거라 매회 눈여겨 보고 있습니다.책이라면 몇날을 걸려 밑줄그어 가면서 읽어야 하는데 이런 좋은 기회가 어디있겠습니까. 수박 겉 핥기 식으로 드라마 한편씩 보며 마치 왕건님에 대해 모조리 다 안다는 양 떠벌리고 싶어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앞에서도 말씀 드린바, 저는 요 시대에 대하여 전혀 모릅니다. 그래서 이 드라마를 보며 역사적인 관점에 몰두하기 보다는 그냥 시청자 나도 한마디 처럼 등장인물들에 대한 나름대로의 의견을 정리하려 합니다. 아직 드라마 종영할려면 까맣게 멀지만 지금까지의 전개된 이야기를 중심으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가 중점적으로 보는 관점은, 세명의 후삼국 제왕들의 입지적 딜레마에 관해섭니다
누구나 인간에게는 딜레마가 있습니다 우리의 탄생도 그렇지 않습니까?
비행청소년들이 마지막으로 부르짖는 말, "엄마, 누가 낳아달랬어요?"
이 한마디는 우리 인생의 영원한 딜레마가 아닐까요
내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태어난 한 세상, 억샌 풍파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를 스스로 깨닳아 갈수밖에 없는 인간의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지금도 덥수룩한 사상가들이 매일 밤을 새고 있겠지요.
잠시 말이 옆으로 새어나갔네요. 어쨋든 견훤 궁예 왕건의 단군인민공화국 만들기가 지금 방영되고 있는 가운데 저는 역사적 사실에서의 진실이 아닌 한 평범한 아줌마 시청자로서 kbs드라마에 나오는 세명의 피할수 없는 딜레마에 대하여 재미있는 비교를 해 보았습니다

1)견훤.
그는 전라도 사벌주 군주의 장남으로 태어나 그 역시 아버지-아작의 호된 역성과 기대,멸시로 범벅된 장남콤플렉스를 이기지 못하고 한낱 신라의 조금 유명한 장수로 투신하여 살아가다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뛰어난 용전술과 지략으로 순식간에 주위의 추앙을 한 몸에 받으며 광주에 그의 첫 궁궐을 지은 후 후백제를 세워 대왕이 된다
그의 딜레마는 바로 오이디푸스와 같은 파파 콤플렉스에 본거를 둔것으로 보인다
현재까지 방영된 내용으로 보아 아마 궁예가 탐을 내는 땅이 바로 아버지의 사벌주라하니
그는 본인이 원하든 또 원치 않든 사벌주를 차지하기위해 아버지와의 피비린내나는 혈육의 파탄을 맞을 것으로 예상된다.
견훤의 딜레마는 애시당초 부친과의 석연찮은 관계, 즉, 부친의 대세운과 상극되는 대전운을 타고 난것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궁예마냥 나는 미륵불입네 하며 혹세무민하는 배짱이 있는 것도 아니고 왕건처럼 친화와 온유로 끈질기게 기다릴 법을 모르는 견훤의 성급함은 그가 청년에 신라로 뛰어든 후, 그곳의 장군이 되었는데도 다시 고향에 돌아오면서는 신라의 군사를 도둑질 하여 난데없는 후백제를 세우고 이것도 모잘라 아버지의 몫을 오히려 찬탈한 패륜을 저지르게 하는지라 애시당초 아들을 전혀 한나라의 제왕감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아비의 덜미에 잡힌 딜레마라 하겠다.
이 대목으로 볼때 왕건과는 얼마나 큰 차이를 보이는가,
왕건의 아비 왕륭은 오히려 아들의 탄생 신화를 굳게 믿고 아들이 제왕이 되기 위한 모든 수업을 배려해주지 않았던가.
고금을 통털어 봐도 아들에게 있어 전폭적인 아버지의 지지란 한 사내의 장래를 좌우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경우는 현대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며 부자간의 콤플렉스란 오이디푸스 신화처럼,견훤과 아작의 경우처럼 무서운 전쟁을 몰고 오기 마련이다.
모름지기 한나라의 창시자란 범상치 않은 천운을 지닌 자만이 가능하며 모든 콤플렉스와 딜레마를 극복할 수 있어야 하나 견훤은 그의 아비의 판단처럼 천운의 수혜자가 되지 못하였다.

2) 궁예
그는 통일신라의 왕자로 태어났으나 권력다툼속에서 아비로부터 버림 받은 뒤 피난 중에 한쪽 눈을 잃고 송악땅까지 도망와 훗날의 경쟁자 왕건의 집에서 생명을 부지한다.
--도대체 궁예란 인물은 은혜를 입은 자들에게 오히려 보복을 가하는 비운의 운명을 타고 난 것이 아닐까 (그의 실질적인 세력확대를 뒷받침해준 장인인 양길을 죽이고 마는 사실 또한 그 운명을 뒷받침 하는 것 같다)--
송악사에서 승려가 된 이후로 미륵불임을 자처하며 새로운 제국을 건설하려는 청운의 꿈을 안고 자신의 고향땅인 신라에서부터 출발하여 승승장구 끝에 결국 왕건의 땅인 송악에 후고구려의 도읍을 정하고 황제라 불리게 된다.
지금까지의 드라마 전개상 그의 딜레마는 자신의 출생에 기인하는 걸 같다.
버림받은 자식. 자신이 신라의 왕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는 억울함. 자신의 가족들인 신라왕조의 환락과 부패를 보며 축적한 세상에 대한 적개심...
이 모든것들은 궁예가 세상의 왕자, 아니 황제가 되어 보고자 하였던 동기를 부여하기에 충분한 것으로 보인다 . 궁예를 도피시키고 돌보던 송악사의 법령스님이 궁예가 미륵(세상을 구원하는 현실 속의 실제 석불)을 자처하며 도를 깨우쳤다며 돌아오자, 미친놈이라며 그의 미래를 걱정하였다. 이 스님 또한 궁예의 출생에서 비롯된 딜레마의 늪으로 말미암아 궁예의 그릇된 욕망은 실현될수 없다는 것을 예언한것으로 보인다.
황제의 천운이 아닌데 스스로 미륵을 자처하였으니, 부득이 제왕이 되기 위하여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일으킬 것이고 또 무고한 백성들이 죽어나갈 것을 염려한 것이리라.
이윽고 궁예는 북원의 양길을 만나 양길의 신임과 그의 군사, 그리고 그의 딸을 더불어 얻고 마침내 철원,명주(강릉)까지 진출하였으나 이 과정에서 양길을 배신하고 양길의 군대를 모두 회유하여 자신의 수하로 삼는 실수를 저질르고 마는데 이또한 영원히 풀 수 없는 자신의 딜레마에서 헤어나지 못한 선택이었다. 양길이 자신의 장인인데 어찌 그를 배신한단 말인가, 배신하지 않고서는 궁예가 그 많은 군사들을 얻을 수 없었을 법, 결국 궁예는 자신의 출생비화처럼 또다른 가족간의 불화를 조장하고 만다
더우기 미륵이라 자처하는 사람이 양길의 딸 미향과 아들을 두었고 또 그 혈육인 아들을 내쳐 버렸으니. 버림받은 아비의 버림받은 자식. 이 또한 그의 심각한 딜레마라 할 것이다.
미륵을 자처하며 백성들을 위한 다 하던 본래의 취지를 무너뜨리는 피바다의 살육을 감행하던 궁예는 드디어 송악을 점령하고 왕건을 수하로 삼다 못해 그의 약혼자 마저 황후로 삼으니 이것 모두 궁예의 황제가는 길의 올가미 이리라.
그의 후고구려의 시작은 개인적인 보복감정으로 비롯되었으며 스스로 미륵임을 자처한 것도 하나의 멍에를 지고 나아가는 길이 되고 마니 거미줄처럼 얽힌 그의 통치철학의 애매모호함이 결국은 종간과 은부라는 수장의 지나친 충성심과 같은 잣대로 언제나 좌지우지되는 결과를 낳는다.
한 나라의 건국이 그 같은 복잡한 설계로 이루어질 수는 없는 것, 명분이 없는 국가란 있을 수 없음이 그의 후고구려의 앞날에 커다란 딜레마로 얼룩지고 마는 것이다
오늘 방영된 양길의 죽음은 궁예의 실패전의 시작에 불과한 것이며, 양길의 땅에서 일어난 무고한 백성의 살생을 목격한 궁예의 수장 왕건은 살생으로 이루어진 점령이란 모래성과 같은 것임을 더욱더 되새기게 된다. 그렇다면 왕건은 딜레마가 없었기에 고려왕조 창건에 성공하였을까. 아니다, 그에게도 분명 딜레마는 있었다. 견훤, 궁예보다 엄청난 사선의 딜레마가 얽혀 있었던 것이다

3) 왕건
얼마전 kbs1tv에서는 왕건의 시청률을 올리고자 "도선비기"라는 다큐멘터리를 방영한 바 있다.
우리나라 풍수지리의 창시자인 도선대사는 고려건국의 대지가 바로 송악땅에 근거를 둔 다 하고 그 시조를 왕건이라 예언하였다 한다.
여러분은 어떤 용한 점쟁이가 여러분의 미래를 한 치 어긋남 없이 예언하여 준 다면 기분이 어떠하겠는가. 그것도 시시한 점괘가 아닌 한 나라를 새로이 건국하여야 할 사람이 바로 당신이라 한다면 반응은 두가지일 것이다
일단 영웅심에 휩싸여 의기양양 모든 사람들을 휘어잡을 군주의 모습으로 나서대고 싶은 충동과, 또한 그 시기를 끝까지 기다리며 만반의 준비와 지략을 응칩하고 언제든 튀어오를 여력을 남겨두고픈 숨겨둔 재미, 이 두가지의 방법이 있을것이다.
왕건은 후자를 준비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의 아버지 왕륭은 아들의 범상치 않은 운명을 예언한 도선대사의 뜻을 받들어 어려서부터 황제수업을 시켜주었고 성장한 뒤 이런 예언을 알게된 왕건 역시 송악사에서 한달간 참선 끝에 오히려 궁예에 굴복하며 그에게 후고구려를 미리 밭갈이 하도록 지켜보고만 있는 유유한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그의 딜레마는 아버지를 잃고 송악을 상납하고 정혼자 마저 궁예에 빼앗기는 역경 속에서, 그를 위협하지만, 오히려 모든 것을 순순히 내어주고 의형제까지 맺으며 그의 심복이 되는 인화력으로 사그라들고 만다.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도록 그의 딜레마는 가려져 있는 것이다
왕건의 딜레마는 도선대사의 예언이다. 궁예와 비추어 볼때 궁예는 스스로 황제가 되고자 안간힘을 쓰며 미륵을 정당화하기 위한 거짓도 때로는 일삼지만 왕건은 막강한 힘과 예언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처음 시작의 자세로 돌아가 신하의 입장에서 차근히 걸어올라오는 편을 택한다.
결코 살생하지 않고 적을 만들지 않으며 단지 고매한 인품과 표용력으로 조용한 반란을 시작 중이다.

4) 3인의 딜레마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
견훤과 궁예가 지략과 용맹, 인품이 왕건 만 못하여 태조가 되지 못함이 아니라 결국은 자신 내부의 딜레마를 풀지 못한 데서 실패의 원인이 있는 것 으로 보인다.
이 드라마가 방영되기 전에 언론은 왕건이야 말로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인물이라며 왕건에 대한 다시보기를 부추겼는데, 생각해보면 일리가 있어보인다
대한민국 건국 이후 대통령들의 모습은 언제나 심각한 딜레마의 입지를 벗어나지 못한 비극의 말로였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그리고 김대중..
매국의 돌덩이를 얻어 맏을 뻔 한 사람, 쿠데타와 유신을 앞세운 사람, 재차 반복되는 억압, 부패,살생을 전두한 사람, 야당임을 자처하다가 돌연 정권에 굴복하고 나 아니면 안된다던 사람, 지역감정의 수혜자이면서 피해자라는 딜레마를 전혀 벗지 못하는 사람,,,,
어찌보면 왕건의 출발 모습은 우리가 기다리는 새로운 지도자상을 보여주고자 하는 작가의 노력으로 색칠되어 가는 것 같다. 젊고 수려한 외모, 문무에 능하면서도 겸손하고, 온화한 전혀 새로운 지도자
의 모습으로 왕건이 매주 주말밤을 장식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같은 순진한 소시민들은 지도자니 권력이니 하는 것에 전혀 무뇌한 인지라 새로운 각도로 드라마를 시청하는 재미가 더 좋을 것 같다.
누구나 성공과 출세를 꿈꾼다. 자신이 못하였으면 그 자식에게라도 바라는 것이 인지상정인 것 같다
신문지상의 유력한 인물로 꼽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어보면 공통점이 있다.
자신의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분명한 철학이 담겨있다는 것이다. 그 분야가 과학이던 문학이던 하다못해 연예인 이라도 자신만의 색깔이 담겨져 있는 영웅들,,,,
무조건 달려가기만 하면 성공하는 것도 아니며 걸어다니는 브래타니커 백과사전도 할 일 없이 책꽂이에 ??여 있기만 해서 영웅이 되는 건 더욱 아닐 것이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로써 더욱 더 이 드라마를 주목해 보는 것은 보다 우리 아이가 자신이 부딪힌 딜레마를 냉정하게 바라보고 그것을 오히려 성장의 계기로 삼으면서 죽어있는 지식이 아닌 산 지식을을 몸 속에 에너지로 저장하며 살아가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주위의 사람들을 적으로 만들지 않고 모두 품을 수 있는 인화력을 가진 아이.
자신이 무엇때문에 공부를 하며 어떻게 즐기며 살아갈 것인지를 구상하는 아이.
분명한 자기 철학가지고 사는 아이로 커가는 것을 뒤에서 도와주는 것이 오직 부모의 할일이고 책임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