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저도 이 영화를 끝까지 보기는 했지만 정말 말하려는
주제가 무엇인지 상당히 헷갈리더군요.
탐크루즈가 좋아서 보긴 했지만 굳이 탐크루즈에 시선을 집중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더군요.
다양한 주인공들과 엇갈리면서도 우연히 교차되는 삶들을 볼
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도대체 왜 제목이 매그놀리아(목련)인지 이해가 안되었구요. 개구리 비의 의미는 무엇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마침 어제 추적 60분에서 부모를 살해가 이은석이야기에서 매그
놀리아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부모가 가해자입장이고 자식이 피해자입장이 되었을때...하더군요.
아...그런 시각으로 볼 수도 있구나 했습니다.
매그놀리아의 홈페이지를 찾아가 봤더니 아래 글이 있더군요.
음...맞아...그래 그렇구나..하는 생각이 들어서 퍼왓습니다.
뭐 매그놀리아에 대한 혹평도 상당히 많더군요..
전 그래도 볼만한 영화란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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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근묵님의 글입니다.
개구리 비가 개이면 하얀 목련이여 피어라!
"하얀 목련이 필 때면 다시 생각나는 사람, 언제까지 내 사랑이어라..."
올 봄에도 어김없이 목련은 피어났고 라디오에서는 "하얀 목련"이란 노래가 흐드러지게 흘러나온다. 계집아이도 아닌 것이 봄만 되면 들떠서 엉덩이를 진득하게 붙이지 못하고 바람난 강아지처럼 싸돌아친다고 꾸중하시던 어머니. 허나 이 찬란한 봄날에 어머님의 삼십 년 꾸중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극장가에도 "목련(Magnolia)"이 활짝 피었다기에 암내 맡은 강아지처럼 쪼르르 달려간다.
영화사에 남을 명작, 톰 크루즈의 연기는 완벽 그 자체다, 경탄해마지 않을 프롤로그로부터 관객을 흡입하는데 성공했다, 금년도 최고의 걸작, 사이먼 & 가펑클의 <졸업>이래 사운드트랙계에 나타난 최고의 작품, 모든 배우가 최정상의 연기자, 가공할 걸작, 20세기 최후의 획기적인 사건,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은 새 천 년을 맞는 미국을 완벽하게 표현했고 그 공적은 별 점 4개 이상의 가치가 있다.... 제57회 골든글로브 최우수 남우조연상, 제50회 베를린영화제 최우수작품상(황금곰상), 제72회 아카데미 어워드 3개 부문 노미네이트, 시카고 비평가상 4개 부문 노미네이트... 영화를 보기도 전에 <매그놀리아>에 붙은 화려한 수식어들에 주눅이 든다. 이제 막 서른이 된 젊은(나보다 어린) 감독의 작품인데 뭐 그리 대단하다고 이 호들갑들일까.
한 아이가 자기 집 건물 옥상에서 투신한다. 추락하는 그 소년의 몸에 어디선가 날아온 총알이 박힌다. 소년은 건물 아래 설치된 그물에 떨어진다. 자살은 기도했지만 총알을 맞지 않았으면 죽지 않았을 소년. 그런데 공교롭게도 총알을 날린 사람은 다름 아닌 이 소년의 어머니였고 이 어머니는 살인죄로 체포된다. 빈총을 들고 죽어라 싸우는 부모에 진저리가 난 소년이 진짜 죽어보라는 심정으로 부모의 총에 실탄을 장전해놓고 옥상으로 올라가 투신자살을 기도했는데 평소처럼 싸우던 부모가 빈총인줄 알고 발사한 총에서 실탄이 날아가 추락하는 소년에게 박힌 것이다. 이 절묘하고 기가 막히고 허무한 상황으로 시작된 영화는 이어 두 축으로 진행된다. 병든 아내와 어린 아들을 팽개치고 살다가 과거를 뉘우치며 죽어 가는 노인과 그 아버지의 성을 버리고 다른 이름으로 세상에 나와 섹스의 전도사가 된 아들의 이야기가 한 축이고 명망 높은 퀴즈쇼 진행자인 아버지와 그에게 성추행 당한 악몽을 마약으로 지워가려는 딸의 이야기가 다른 축이다. 어두운 과거 때문에 분노와 상실과 절망으로 얼룩진 상처받은 영혼들. 그 옆에는 죽어 가는 노인의 아들을 찾아주려는 간병인, 마약에 찌든 여인에게 연민을 느끼는 경찰관이 그들을 절망뿐인 삶에서 구해내려 하는데... 그렇게 모든 갈등이 파국을 향해 치달을 즈음, 하늘에서 갑자기 수많은 개구리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린다. 세상의 모든 거짓, 위선, 기만에 대한 단죄일까, 아니면 사랑과 용서일까.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다시 기가 죽는다. 젊은 감독에게 쏟아진 격찬과 화려한 수식어에는 조금의 보탬도 없었다. 여러 인물의 하루동안 에피소드를 절묘하게 모자이크 구성한 연출력이 놀랍고 그 하루로 미국 사회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놀랍고 갓 서른의 젊은 나이에 부모와 자식, 분노와 용서, TV와 현실, 갈망과 상실 등의 문제를 그토록 따뜻하고 깊게 바라보는 시선을 가졌다는 것이 놀랍다. "계집아이도 아닌 것이 봄만 되면 들떠서 엉덩이를 진득하게 붙이지 못하고 바람난 강아지처럼 싸돌아치냐!" 문득 어머님의 삼십 년 꾸중이 뇌리를 스친다. 미국의 젊은 감독에 비하면 "나"라는 존재는 또 얼마나 초라한가.
초라해지다 못해 은근히 부아가 치민다. 생각해보니 폴 토마스 앤더슨이란 어린 녀석은 참으로 건방지다. 임권택 감독도 만들지 못한 3시간이 넘는 "대작"을 젊은 녀석이 만들었다는 것부터 마음에 들지 않고, 영화에 목련 한 송이 "목련"이라는 대사 한 마디 나오지 않는데 단어가 마음에 들어 제목을 그냥 "Magnolia(목련)"라고 붙였다는 천연덕스러움이 얄미우며, 성경의 출애굽기에 나오는 "개구리 재앙"을 차용하고도 "그냥 멋있게 보이려고 그랬다"는 뻔뻔스러움이 건방지다. 여기서 녀석의 인터뷰를 들어보자.
"영화광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감독으로서 인간으로서 건강하게 성장했다고 생각하니?"
"영화는 내 DNA 속에 있다. 난 영화와 함께 영화 속에서 자랐고, 영화가 시키는 대로 살았다. 영화가 생활이고, 생활이 영화일 수 있었던 건, 혼돈스럽기는 하지만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가끔씩 영화로 간접 체험한 상황이 현실에서도 벌이지지 않나. 영화는 그럴 때 길을 보여준다. 그게 건강한 삶인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내 경우엔 더 나은 인간으로 성숙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 영화였다."
제길! 녀석의 말을 들어보니 서른 나이가 결코 어린 게 아니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좋아하며 하는 일이 DNA 속에 있다고 믿을 정도로 치열하게 살았다면 말이다.
나도 "치열하다"란 단어를 치열하게 좋아한다. 하지만 그 단어만 좋아했지 치열하게 살지는 못했다. 책을 좀 읽었다고는 하지만 아직 한 수레 분량도 못 읽었고 공부 좀 했다고 하지만 아직 영어 회화 한 줄 제대로 못하며 시나리오를 쓴다고 썼지만 딸랑 한 편 영화화되어 흥행에 참패했을 뿐이다. 생각하니 <매그놀리아>에 나오는 장엄한 개구리 비는 치열하기는커녕 헐렁하기 그지없이 살아온 나를 비롯한 세상의 못난 사람들에게 내려져야 옳다. 머리 위로 떨어진 개구리가 충격으로 내장이 파열되는 끔찍함, 딛는 발 아래에서 개구리들이 찌직 소리를 내며 죽어 가는 섬뜩함이 눈앞에 펼쳐진다. 불법으로 당선된 국회의원과 벤처를 빙자하여 남의 돈을 갈취한 사기꾼은 두려움에 떨고, 당당하게 싸웠지만 열 표 차로 패한 낙선자와 가난하지만 열심히 살아왔던 사람들은 숙연하게 받아들이며, 펜과 혀끝으로 사회와 문명을 비판하는 식자(識者)들은 장대한 볼거리에 눈이 휘둥그레진다.
하지만 나는 믿는다. 이 개구리 비가 개이면 화사한 하얀 목련이 피어나리란 것을. 그리고 무당이 되어 조물주에게 건방지게 주문을 외어본다.
"이 처참한 개구리 비가 개이면 하얀 목련이여 피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