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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 글> 쉘 위 댄스.... 왜 장바구니 들고 춤추러 가면 안 되지?


BY 한여름 2000-07-18

아래의 글은, 소설가 김영하가 월간 스크린에 쓴 글을
퍼온 글입니다.
무척 재미있는 시각으로 쉘 위 댄스를 봤기에,
그리고 우리 아줌마들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고 또 반론을 펼칠 수 있는 글이기에 퍼왔습니다.




쉘 위 댄스

쉘 위 댄스는 재밌다. 왜 재밌을까? 주인공이 춤을 잘 춰서? 그건 아닌 것 같고. 그럼 댄스 영화를 처음 봐서? 그것도 아니고, 한국 드라마처럼 빛나는 조연들이 있어서? 글쎄, 그걸로만 설명하기는 좀 뭐하고. 어쨌든 쉘 위 댄스는 재미있다. 보고 나면 누구라도 아, 나도 춤이나 한 번 춰볼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만큼.

딴지일보가 얼마전 GGR이란 신종발명품을 소개한 적이 있다.
지루박지루박 레볼루션이라는, 이름부터가 어쩐지 희극적인 그 기계에 대한 소개는 왜곡된 댄스문화에 대한 비장한 성토로부터 시작한다.

말인즉, 최근 길거리에 우후죽순처럼 들어선 DDR과 펌프등 댄스기계들은 지나치게 젊은 층의 취향만을 고려하고 있다, 헌데,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댄스문화의 주역은 사실상 10대나 20대가 아니라 카바레와 관광버스로 상징되는 30-40대 중년층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언감생심 저널리즘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하는 건 물론이거니와 툭하면 가정파탄의 주범으로 지목되기 십상이다.

"이것은 차별이다!" 딴지일보는 주장한다. 하여, 이들은 이 나라 댄스문화의 균형적인 발전과 온 국민의 체력향상을 위해 고심 끝에 지루박지루박 레볼루션을 만들어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GGR의 작동원리는 간단하다. 관광버스를 시뮬레이션 했기 때문에 발판엔 앞뒤화살표만 있고 옆 화살표는 과감하게(?) 없앴다. 그리고 옆에는 손잡이도 설치했다. 위에는 지구본 모양의 회전구를 달아 조명을 때리고 화면에는 트로트 계의 거두들인 설운도와 태진아, 현철의 동영상이 나타나야한다나.

뜻이야 가상하다만 딴지일보의 이 장난끼 다분한 발명품을 들여다보면 여기에도 역시 성인 댄스문화에 대한 비아냥과 몰이해가 그대로 드러난다. 이들에게 성인들의 댄스문화란 진지하게 고려되어야할 하나의 문화가 아니라 그저 해프닝이거나 한때의 바람기일 뿐이다.

왜 그럴까? 숫자를 가늠하기 힘들만큼 많은 사람들이 시사고발 프로그램의 카메라를 피해, 일단 유사시에 재킷을 뒤집어쓸 각오를 하며 어두운 골방에서 춤을 추어대고 있는데도 왜 이들의 이런 행위는 한번도 진지한 담론의 영역에서 논의되지 못했던가.

70년대나 80년대 신문들은 심심하면 한번씩, 장바구니를 들고 댄스홀에 드나드는 여성들의 뒷모습을 찍어 독자들을 즐겁게 해주곤 했었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선 한 번 되물어도 좋은 게 아닐까.

왜 장바구니를 들고 카바레에 가면 안 되는 거지? 장바구니를 집에 놓고 오라는 건가? 아니면, 라스포사에서 옷 한 벌 근사하게 차려입고 가라는 건가? 이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어이, 아줌마. 장바구니 들었으면 집에 가서 밥이나 할 일이지, 감히 언감생심 쾌락을 좇아? 그런 말이 아니라면 굳이 장바구니에 초점을 맞출 리가 없다.

그렇다. 그들은 댄스를 근대화 이데올로기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모두들 위대하신 박통의 치하에서 불철주야 조국 근대화에 몸 바치고 있는데, 너희 남편은 외화 벌러 사우디아라비아까지 가서 철골조립하고 있는데, 너희들은 장바구니를 들고 아싸라비아를 외치며 춤을 춰? 사회는 사회를 위해 몸바치는 자들의 아내를 책임질 의무가 있다?

왜 이런 공격은 여성에게만 집중되었던가? 그 대답은 간단하다. 근대화의 기치 아래에선 남자들은 추고 싶어도 그럴 시간이 없었다. 그러니 몇 안 되는 제비들이나 때리면 그만이었다.

그리하여 춤은 프로페셔널만의 것으로 자리잡았다. 대학교엔 무용학과가 생기고 러시아 발레단의 프리마돈나가 된 한국소녀들도 나왔다.

우리가 불철주야 선진조국창달에 몸바치는 동안 일반인의 춤은 일부 정신나간 여편네들과 제비족의 전유물로 전락했다. 시사고발프로그램들은 꾸준히 춤과 가정파탄의 관계를 탐구했다. 반면 춤은 노동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허용되었다.
할머니, 할아버지, 십대의 춤은 아름답지만 노동자와 주부의 춤은 죄악이었다. 노동자는 재화를 생산해야하고 주부는 그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을 꾸준히 재생산할 수 있도록 만들어줘야 했으므로.

이쯤에서 우리는 의문을 품게 된다. 도대체 춤이 무엇이기에, 그토록 철저하게 모욕하고 무시하고 짓밟아도 계속 추는 사람들이 생기는 걸까?
왜 그들은 가족과 사회의 감시와 억압을 피해 어두운 볼룸에서 춤을 추어대는 걸까? 혹시, 거기엔 우리가 모르는 뭔가 대단한 즐거움이 있는 건 아닐까? 금단의 열매처럼 달콤한 그 무엇이 말이다.

사실은 국가가 금지하는 쾌락은 춤말고도 많다. 국가는 정해진 배우자가 아닌 다른 이와의 섹스도 금한다. 뿐만 아니라 미성년자의 흡연도 금지하고 심심하면 해외여행에도 철퇴를 가한다. IMF 사태를 불러온 원인이 이른바 '무분별한 해외여행'이 아니라 헤지펀드로 상징되는 핫머니, 취약한 외환관리체계, 단기중심의 외채구조, 불투명한 기업회계 등에 있었음이 속속 밝혀지고 있지만 IMF가 터졌을 때 제일 화면에 자주 등장한 건 시골 장바닥 같은 김포공항의 모습이었다.

우리 사회가 제일 먼저 무분별한(?) 해외여행에 칼을 들이댄 건, 일종의 조건반사로 보일 정도였다. 우리 사회는 어려움에 직면하면 마치 공식처럼 쾌락원칙을 폐기하는 일부터 시작한다.
경제가 어려워? 쇼핑의 즐거움을 포기해야한다. 여행의 설렘도 빨리 포기하는 게 좋다.
오일쇼크? 자기 차를 타는 즐거움을 버려야한다. 장롱 속에 쌓아둔 금덩이를 꺼내보던 기쁨을 반납해야한다. 즐거움을 포기하면 사회가 건강해진다? 과연 그럴까?

국가는 거대한 수도원처럼 손에 선물보따리를 쥐고 있다가 좀 살만하면 나눠줬다가 조금 어려워지면 순식간에 거둬들인다.
쾌락의 통제.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한국경제의 견인차였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노동생산성이라는 조악한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이 쾌락의 국가독점원칙에 우리 모두도 알게 모르게 물들어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경제가 어려워지면 자동적으로 죄의식을 느낀다. 사실은 그게 문어발식 확장을 거듭해온 재벌이나 경직된 관료체제, 가격경쟁력에 기반한 취약한 수출구조 때문임에도 불구하고 지난 몇 년간 다녀온 해외여행을 반성하고(뿐만 아니라 가는 사람도 혼내고) 큰 맘 먹고 들여놓은 오디오를 저주한다.
이 어쩔 수 없는 노예근성. 왜 우리는 자신의 쾌락에 대해 당당하지 못한가.
이렇게 말할 수는 없단 말인가. 아버지, 대통령각하, 어머니, 부장님, 저도 춤추고 싶어요. 다른 나라 구경하고 싶어요. 망해도 제가 망해요. 나라 탓은 안 합니다. 대신 나라도 제 탓하지 마세요!

쉘 위 댄스는 개인의 쾌락원칙과 국가의 경제원칙이 충돌하는 바로 이 지점에 위치해 있다.
40대의 잘나가던 샐러리맨.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 이 남자가 어느 날 댄스를 배우기 시작한다. 그것은 우선적으로 삶에 대한 그의 태도를 바꾸며 가족과 그가 속한 회사에 작은 균열을 가져온다.
그의 퀵스텝, 그의 월츠가 묻는 것은 이것이다. 나는 가족을 위해, 회사를 위해, 일본주식회사를 위해 40평생을 바쳤다. 그런데 왜 나는 즐겁지 않은가? 왜 나는 기쁘지 않은가? 왜 내 삶은 이토록 지루한가?

"춤추지 않으시겠어요?" 이 대사는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그때의 춤은 더이상 춤이 아니며 자본주의적 일상 속에 찌든, 우리가 그 동안 포기해왔던, 작지만 강렬한 쾌락원칙의 현현이다.

공부해라, 열심히 일해라, 노후를 위해 저축하라, 우리가 날마다 들어야하는 이 지겨운 정언명령 뒤편에서 썩어가고 있는, 즐거움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 아무 것에도 유용하지 않지만, 아무 것도 생산하지 않지만, 그렇기에 더욱 즐거운 어떤 것들. 그것이 춤이며 여행이며 작은 일탈이다.
그러니 한 곡 땡겨보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