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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에게 남학생 방을 쓰지 못한다고 한 학교의 방침이 차별행위라고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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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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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살던 고향은...


BY 석광희 2012-09-13

나는 서울 용산구 한강로에서 태어나 초등 5학년까지 살았다

 

집 뒤로는 시외버스 주차장이 있어서 아침부터 소음 그 자체였으며

시골 태생이신 인심 좋은 어머니께선 객지나와 고생한다며

수시로 차장언니들을 데려다   밥이며 간식이며 먹이셨다

어린 나는 기름냄새 나는 언니들 조수 오빠들이 그다지 좋아보이진 않았다

 

학교가 50보만 걸으면 갈수있단 것과 10여분만 걸으면 한강에가서 얕은곳서

친구들과 잠시라도 놀수있단 것을 빼면 용산의 기억들은 별로없다

 

큰남동생이 다섯살 봄에 고열로 청각장애를 얻었다

 엄마는 코앞이 찻길이라는 것에 크게 마음 쓰이셨고  5.16이나4.19를 집 앞 큰도로에서 본신터라

큰남동생의 교통사고를 염려하셔서 한강다리를 건너 상도동이란 곳에  이사를 하셨다

 

낯선 곳이지만 마당이 용산집보다 훨씬 큰것에 좋았고 무엇보다 대문밖엔 셀수도 없을 만큼의 버드나무들이(수양버들이라고도하나?)

도로 가운데 개천을 막아주는 멋진 풍경에 어린 나는 숨통이 뚫리는 느낌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봉천동이란 동네도 없었던 시절이다 용산보담 뭔가 시골스러움..?나는 그점이 너무 좋았다

 

여름이면 큰마당에 옥수수며 온갖 야채들과 꽃들이 사이좋게 웃는 모습으로 우리 여섯 형제들을 항상 반겨줬고

 수세미 넝쿨들이 평상의 햇볕들을 기막히게 가려주며  여름 간식인 찐감자와 왕토마토 찐옥수수가 우리에겐 임금님의 수라상보다 더 훌륭했다

 

다알리아 수국은 아직도 추억속의 아름다운 나의 꽃 친구들이다

 

대신 학교를 한참을 걸어야 (30분?)등교하니 고것이 좀...(그학교를 아들과딸도 졸업해서 내후배인 셈이다)

소심하고 숫기없고 키만 삐죽 큰아이가(그땐 큰키였다) 전학해서 구석에 쭈그러져있는데

착한 친구들은 반갑게 맞아주며 금새 오랜 친구들인양 자연스러워지기도

 

동창들 중 지방 친구들의 시골 이야기 못지않게 나도 추억꺼리가 많은 셈이다

 

나는 나눔을 엄마에게 배워서인지 뭐든 나누길 좋아한것같다

그러니 더욱 친구몰이를 능숙하게 한셈인가보다

그때 중학입시로 우리 세대는 5학년~6학년까진 하루 잠자는시간이 너댓시간이 고작이고

친구 언니한테라도 늦은밤까지 붙들려 과외란걸 해야했다 (공부시간은 매우 슬펐다)

 

그와중에도 우리집 마당이나  골목서 친구들과 놀다 호되게 야단도 맞고..

만화책을 우리친구 서넛이 몰래 빌려다(공주스토리만화)우리집 지하실서(일본식집이라 아마 있던모양)독서삼매경에...

 상습적으로 고짓꺼리를하다 결국 또 들켜 호되게 회초리 신세 (엄마는 만화책을 아궁이에 모두 태우셨다)  

 

이상스레 그사건 후론 지금껏 만화책은 본적이없다 아마 불타는 만화책에 쇼크를 받은 모양~ㅎ

 

중학교를 입학해선  하교길엔 한강다리를 걸어 친구들과 재잘되며 돌아오곤했다

아마 중교 3년 내내 추위도 불사하고 단발머리 흩날리며 조잘거리는 하교길이였던것같다

내인생의 가장 행복했고 다시 돌아가고 싶은 시간이 허락한다면 서슴없이 나는 그시절이다

 

상도동을 떠나온지 벌써 20여년이 다 되어오지만 내마음은 언제나 상도동 우리집 마당 한가운데 서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