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고 있는 웨스트 7가를 지나 그랜빌 아일랜드를 가려면
주차장을 지나는 길목에 5세 이하 어린이들의 유아원과 유치원이 있다.
아이들의 등원과 내 출근 시간이 비슷해 아침마다 아이들을 데려다 주는 부모들과 마주친다.
이것들이 인간인지 인형인지 만져 보고 싶은 충동이 일 만큼
깊고 푸른 눈에 노랑머리를 나폴거리는 아이들을 보면
플라스틱 인간인 듯한 착각이 들 지경이다.
그런데 요 이쁜 것들도 엄마 아빠랑 헤어지지 않으려고
유치원 문앞에서 생떼를 쓰며 버티는 걸 간혹 보게 된다.
이쁜 것들은 울어도 이쁘고 웃어도 이쁘고 찡그려도 예쁘고
또 아이들의 땡깡에 대처하는 캐네디언들의 행동이 궁금해 지켜 보다가
한국과 다른 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아이의 손을 잡고 데려다 주는 모습은한국과 비슷하다.
그리고 아이와 이야기를 할 땐,
허리를 굽히거나 앉아서 아이의 눈높이에 아빠의 눈높이를 맞춘다는 것이다.
아빠의 무릎 높이만한 쪼그만 이 악동들이
유치원 문 앞에서 안가겠다고 버티면
180센티 넘는고목나무 같은 아빠들이 키의 절반을 꺾어
아이와 눈높이를 맞춰 달래는 모습은 정말 재미있고 가슴이 찡할 때도 있다.
코딱지만한 게 입은 댓발 내밀고 버티면
아이보다 다섯 배는 덩치가 큰 아빠들이 아이의 이유를 들어주고
귀를 기울여도 잘 들리지 않을 만한 작은 목소리로 조근조근 설명해서
끝까지 이해를 시키려고 기다리는 걸 본다.
이렇게 목소리 낮춰 이야기 하는 것은
아이가 겁에 질리지 않은 자유로운 상황에서 왜 그래야만 하는가 스스로 생각하도록 만들고
두 사람 사이에 일어 나는 일을 타인이 알지 못하게 함으로서
아이의 프라이버시를 지켜주려는 의도인 듯 하다.
지켜보는 내가 하두 답답해서 당장 달려가
‘으휴~ 이 콩알만한 것이 얼른 안 들어가?!!”
한대 쥐어 박고 싶은 마음이 들 만큼 구경하는 내 속이 터질 대도 있다.
한국 아빠들이라면 바쁜 출근길에 아이가 세 마디 이상 하게 만들었다면
벌써 눈을 부라리며 버럭 화를 냈거나
성질 급한 사람이라면 겁을 줘서 끌고 들어가 유치원 선생님 손에 억지로 떠 넘기고
울든 말든 뒷 일은 선생님 책임이라는 듯, 떠났어야 할 시간이다.
끝까지….
아이가 동의할 때까지 다시 설명을 하고 힘으로 안고 들어가거나 선생님을 부르지 않았다.
내 출근길이 바빠 끝까지 보지 못하고 갈 때도 있었지만
결말이 궁금해서 지각하면서도 지켜 본 적이 몇 번 있었다.
설명한다고 저 꼬맹이가 이해 할까 하는 마음과
저러다 아빠도 회사에 늦을 것 같은 조급함에도
20분 30분 그런 말도 안되는(?) 설득을 하며 기다리면
거짓말처럼 모두가 제 발로 걸어서 유치원으로 들어가더라는 것이다.
절대 화를 내거나 어른인 내 사정이 급하다고 아이의 의사를 무시한 채
위협적인 말투나 강제로 끌고 들어가지 않는 그들의 인내심은 존경심마저 느껴졌다.
오늘 아침엔 또 한 녀석이 아빠랑 유치원을 가다가
멀쩡한 길 놔 두고 빗물 고인 물웅덩이에 걸어 들어가 첨벙대며 장난질 치더니
주차장 분리대 쇠창살에 붙은 먼지를 맨 손가락으로 일일이 만지고 털기 시작했다.
“흠,,, 넌 오늘 꼭 엉덩이를 맞던가 된통 혼나겠다” 하며 지켜보았다.
아빠는 아들의 물장난질이 재미있겠다는 듯한 얼굴로 바라보고만 있다.
한국이었음 무지막지 하게 끌려 나왔거나
어쩌면 진짜 몇 대 얻어 맞았을 상황이다.
'야~ 아침에 깨끗하게 입힌 옷인데 빨리 안 나와? 옷 다 버리면 너 혼날 줄 알아!!!
이 경고도 한 두번 하다가 그래도 계속 했다가는 그 다음은 뻔하다.
옷을 더 버렸다면 집으로 끌려가서 엄청 맞을 수도 있고…..
내가 주차장에 도착해서 차에 시동을 걸 때까지
아이는 그대로 먼지를 만진 손을 물에 헹구며 지금 유치원을 가는 길인지
다녀와서 놀이터에 있다고 착각하는지 모를 지경인데도
아빠는 ‘테드! 그만하고 유치원에 가야지?” 한마디 하곤
스스로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차이………
그 차이가 교육에 인성에 어떤 효과가 있을 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아이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아이가 이해하고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기다려 준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 부모들은 ‘경험’을 내세워 부모가 겪고 생각한 경험에 비춰
옳다고 판단한 것을 선택해서 아이에게 쥐어 주는 것이 부모의 도리이며
교육이라고 믿는 부분이 많다는 것이 다른 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행착오를 거치며 실패를 거쳐 성공으로 가는 것도 교육이라는 점을
생략할 수만 있다면 생략하게 해 주는 것이 좋은부모라고 믿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다.
교육학 석사과정에서 이 나라 학교에 교생실습을 다녀온 남편은
한국교사로서 한국 학교와 너무 다른 수업 모습을 보고 충격적이고 놀라
과연 이게 정규학교인가? 아니면 대안학교인가 혼란스러웠다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었다.
초등학교에서는
아이들은 네 명씩 그룹으로 앉도록 배치된 책상은 말뿐
책을 보고 싶은 사람은 책을 보고, 그림을 그리고 싶은 사람은 그림을 그리고
꼭 함께 들어야 하는 수업응 듣고 이해하는 것도 각자의 생각과 의도에 따라
설사 정답이 달라도 그 과정에 논리적인 근거가 있다면 수용한다고 했다.
상상을 해보았다.
어떤 아이는 만화책을 보고, 어떤 아이는 누워서 동화 책을 읽고
저쪽 구석에서는 그림을 그리고, 교사는 그들이 무엇을 하든 제재를 하지 않지만,
공부를 가르치는 일부 시간에도 이론적인 문제 풀이와 답을 내는 걸 가르치는 게 아니라
교재를 가지고 하는 일은 그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을 가르친다고 했다.
직접 교사를 한 적도 없고, 현장 학습을 해 보지 않은 나의 상상력으로는 설명불가하다.
접근방법을 알려주고
스스로 정답을 찾도록 도움을 줄 뿐
교사가 정답을 먼저 제시하지 않는다는 것.
언젠가 남편을 찾아 방문하게 된 하이스쿨에서는
방과후 아이들과 학교 계단에 둘러 앉아 기타를 치고 있는 한 남자와
핫 팬츠에 티셔츠를 입고 땀으로 흠뻑 젖어 아이들과 농구시합을 하는 또 한 남자를 목격했다.
학부형은 아닌 듯하고 누굴까.... 궁금했다.
한 사람은 그 아이들의 담당 선생님, 또 한 사람은 교장선생님이라고 했다.
입시에 매달려 '야자'에 학원으로 죽도록 공부해야 하는 한국아이들이라면
또 공부가 아니라도 권위를 내세우며 군림하려 드는 한국 교사들 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광경에 나는 부러움과 놀라움에 할 말을 읽고 멍하니 바라 보았다.
오늘 sbs '당신이 알고 싶은 이야기'라는 프로에
1등을 놓친 적 없는 '엄친아'의 분신자살 기도를 보면서
그날 기억이 떠올랐다.
살아날 확률 20%라는 이 상황에서도
'착했다'는 그 아이에 대한 ‘착한’ 이유는 모두 '공부'에 촛점이 맞춰져 있었다.
공부를 잘 했기 때문에 착했고, 공부를 잘 했기 때문에 착한 아들이었고
성실한 학생이었고, 고민이 없을 거라 믿었고
아무런 문제가 있을 수 없다고 확신 했고....
그 믿음들이 사지로 내 몰았음을 뒤늦게 깨닫고 눈물 흘리는 부모, 동네사람들, 선생님
프로그램 제작진의 의도까지 모두 모두....
주제는 하나였다.
공부,,,
캐나다 학교 교육에 관한 자잘한 이야기는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