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에서 첫 학기에 아무 것도 알아듣지 못하고 돌아온다는 남편을 보며
답답하기도 하고 안스럽기도 해 강남 8학군 극성 엄마처럼
극성 유학생 마누라로 나섰다.
그의 학과 학과장을 지낸 교수를 입주 가정교사로 채용하고
베지테리언인 선생님을 위해 아침 저녁 점심 도시락까지 야채와 과일 샐러드를 준비해 대령하며
부디 '우리 큰 아들 잘 가르쳐 주십사' 촌지격 정성을 바치며 그녀의 전속 영양사가 되었다.
게다가 모든 수업이 팀별 토론형식이므로 수시 학교 밖 수업준비 모임에는
우리보다 경제적으로 빈곤한 학생들 간식 챙겨 보내고, 전체 학생 스타벅스 커피 값 쥐어주며
나이 들면 입은 다물고 지갑은 열어야 어린 사람들과 융화할 수 있는 법.
밥 값이든 뭐든 투자해서라도 어린 학생들 속에서 겉돌지 않도록 애를 썼다.
놀며 쉬며 자며 하려던 공부가 놀지도 쉬지도 자지도 않고 해도
졸업은 커녕 시험이라도 잘 볼 수 있을까 의문이었다.
한국의 고3도 그렇게 공부할까 싶다.
패스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다행히 한과목만 B를 받고 모두 A학점을 받아 통과했다.
CD에 만성이 된 내 입장에서 A같은 B였건만
방바닥에 대(大)자로 누운 그는 태어나서 B받은 적 처음이라며 억울해 했다.
한국에서 석사과정 할 때 두 번이나 장학금을 받았으니 그렇게 열심히 해도 B라는 사실에
몹시 유학회의증을 호소했다.
그러니 가정교사 선생님을 채용한 고용주이면서도 극진히 모시는(?) 내 태도가
더욱 급 저자세가 될 수밖에.
누군가에게 내가 꼭 한번만 누리고 싶었던 최상의 샐러드 서비스를 제공하며
욕실 딸린 독방에 청소에 빨래까지 해주면서….
그것도 전업주부가 아니라 필리핀 교민신문 기자로, 입국 다음날부터 출근해
방향감각도 없어 택시를 타고 다니며 취재를 하고 있던 상황이었지만 기꺼이 감수했다.
그렇게 존중하던 그 선생, 50대에 작달막한 키, 볼록한 배, 인물로 치면
백 번 내 파출부 혹은 내가 부리는 파출부의 엄마쯤으로 보이는 그녀를
몇 달만에 내 손으로 집에서 쫒아 내는 사건이 생겼다.
내가 월급주는 고용자 입장에서도 부리기보다 공주처럼 극진히 모셨던 건
첫째도 둘 째도 내 남편 공부 도우미가 목적.
무슨 일이든 한번 마음 먹으면 최고가 되길 원하고, 누군가에게 베풀거면 최상의 수준이 뭔지
확실하게 보여주고 마는 내 태도가 거꾸로 문제의 발단이었다.
인간은 주어진 환경에 빠르게 적응하고 타성에 젖는 속성이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내 남편의 선생에게 나는 예외일 수 밖에 없었다.
점점 그녀가 내 위에 군림해도 된다는 착각내지는 망상에 사로 잡힌 듯
돈에 대한 요구를 예사로 하며 나의 예우를 당연시 받아들인다는 게 느껴졌다.
급여가 작다고 하지만 그건 우리의 기준이고
그들의 기준에서 대학현직 교수보다 더 주고 있었는데
딸만 혼자 사는 집의 집세며 전기세와 각종 공과금을 내지 못해 끊길 처지라는 등의 이야기를
남편을 통해 흘리고, 결혼 후 친한 가구점 사장에게서 화이트 컬러 세트로 구입한 가구며
돌침대, 최신 가전들을 해외 운송해 모델하우스처럼 꾸며진 집에서 사는 젊은 외국인 부부.
게다가 우리 사무실에 들러 내가 하는 일을 본 그녀는 우리를 갑부쯤으로 오해 한 듯 하다.
돈에 대한 요구는 누구나 나보다 나은 사람에게 기대가 생길 수 있고
여유가 된다면 선생님 생활에 도움을 주면 좋은 일이라 넘어갔다.
하지만 손가락 까닥하지 않고 나를 파출부처럼 여기는 듯 한데는 점점 괘씸하던 터에
밤 늦게 귀가한 그녀가 저녁식사를 하지 못했다고 하자 가정부도 있는데
남편이 직접 과일을 깎아 주면서 내가 폭발했다. 문제는 그의 표정과 태도였다.
내가 깎아서 입안에 넣어줘도 씹지도 않고 뻐팅기며 한 조각 먹어주는 걸 인심 쓴 것마냥 투덜대는 그가
결혼 후 아내를 위해 과일을 직접 깎아서 준 적은 없으면서
선생을 위해 과일을 깎으며 그 시간까지 저녁을 굶었다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과 더불어
뭔지 모를 애잔함이 묻어나는 표정, 자기는 결코 그런 마음이 아니었노라고 수 백번 설명하지만
나는 한 번 아니라는 판단이 서면 돌이킬 수가 없다.
방에 들어가 누워 있는 내 발가락을 간지럽히며 무마하려 했지만
그럴수록 그동안 파출부 대접에 대한 화까지 추가되어 내보내라고 소리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것도 당장, 바로 짐을 싸서 나가지 않으면 가정부 시켜서 내가 몽땅 싸서 문 밖에 버리겠노라고.
그렇게 정말 다음날 아침 내 보냈다.
흔히 개나 소나 외국서 석박사 학위취득해 고학력 실업자가 늘렸다고 하지만
돈만 내면 졸업할 줄 알았던 필리핀에서의 유학은
그런 학교와 그렇지 않은 학교가 명확히 구분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코피 쏟으며 공부해도 한국학생 졸업하기가 5%를 넘어서지 못한다던 입학 당시 조언들이 떠올라
갈등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어렵고 힘들게 공부해 취득한 학위가
한국에서는 인지도가 낮을 바엔 처음 계획대로 선진국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회사에 사표를 내고 영국을 가기 위해 잠시 들런 한국의 부모님 집에서 캐나다에서 귀국한 오빠와 마주쳤다.
우리의 영국행이 태국여행길에 가이드의 조언으로 필리핀을 경유하는 것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캐나다행으로 급변한 이유는 그렇게 단순 명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