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며느님과 작은 며느님
두 며느리를 한 지붕 밑에서 동시에 거느리고 산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인 걸 요새로 절실하게 알아가는 중이다. 이러자니 저 눈치가 보이고 저러자니 이 눈치가 보인다. 나는 좋자고 하는 일이, 자꾸만 엊박자를 놓는 일이 허다하다. 문화의 차이에서 나오는 불협화도 있지만, 인성의 됨됨이에서 나오는 부조리도 있기 마련이다. 여기 내가 말하는 ‘인성의 됨됨이’란, 누구를 꼭 짚어서 가리키는 말은 아니다. 큰 며느님일 수도 있고 둘째 며느님일 수도 있고, 아니면 좀 모자라는 이 시어미의 인성일 수도 있다. 각자가 다른 인성을 타고 났다는 말이겠다. 다행스러운 건, 참 다행스러운 건 두 며느님이 고운 심성을 가졌음이다.
이 년의 세월이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다. 내 큰 며느님의 경우로 말하자면 긴 시간이었을 것이고, 내 경우로는 짧은 세월이었으리라. 아무튼 그 시간을 매일 부딪치면서 산 며느님과, 멀리서 무늬만 내 며느님이었던 둘째 며느님의 그 행보가 완연하게 다르다는 말씀이야. 누가 더 좋은 며느님인가를 말하는 게 아니다. 큰 사람은 크게 길들여지고 작은 사람은 작게 길들어지더라는 말씀. 내 단연코, ‘큰며느님은 이래야 한다.’고 가르친 적이 없다. 더군다나 둘째 며느님에게도, 일본 여인으로서의 한국며느리의 지침을 가르친 적이 없거늘….
솔직하게 말하자면 두 며느님은 비교하면서 이렇다 저렇다 말하기가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니다. 그러나 확실한 건 크고 작은 것에 대한 비교다. 하하하 우선 크고 작은 건 두 며느리의 키의 차이다. 점잖은(?) 체면에 묻지는 못했지만, 아마 큰 며느님은 165cm를 넘지 싶다. 작은 며느님은 전형의 일본녀(日本女)이어서, 아마 155cm를 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래서 둘을 세워놓으면 자연스럽게 작은 며느님에게 보호본능을 느낀다. 설거지쯤은 손아래 동서에게 시켜도 괜찮다고 하니, 큰 며느님 왈,
“안쓰러워서요.”라고 한다. 기득권을 내세우는 것 같지만, 이게 바로 ‘보호본능’의 발동이겠다.
그러나 크고 작은 건 키를 말함이 아니다. 두어 달을 살펴보니 큰 며느님은 베푸는 입장이고, 작은 며느님은 제 윗동서의 말에 무조건 순종하는 타입이다. 싱크대에서 고무장갑을 끼고 섰다가도, 윗동서가 그만두라고 하면 두 말 없이 장갑을 벗는다. 내 생각엔 그냥,
“제가 해요.”해도 좋으련만. 오해를 할라 치면 충분할 만큼 약삭빠르다. 먹을 것을 챙겨주면서 거실에 나가서 먹으라고 하면 냉큼 들고 거실로 나온다.
“형님도 같이 잡수세요.”하면 오죽 좋겠는가만은.
일본 유학을 오랫동안 다녀온 막내 딸아이에게 그리 말을 하니,
“일본에선 상대방의 영역을 맘대로 건드리는 건 실례예요. 주방은 큰올케 영역이라고 생각하거든요.”한다. 이게 바로 ‘문화의 차이에서 생기는 불협화’라는 거겠다. 큰 며느님이 그걸 알아줬으면 좋겠는데, 도통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으니 그 속을 알 수는 없다. 너무 가까이에서 말로 가르치는 건 금물이다. 자연스럽게 터득하고 알아 나가는 게 좋은 방법이다.
어느 가수의 일본인 부인이 TV에 나와서 하던 소리가 생각난다.
“빨리 한국 요리를 배우고 싶어서 주방에 들어가기만 하면 시어머님이, ‘나가 있어라’하셔서 무척 서운했다.”며 눈물을 펑펑 쏟던 그녀. 그건 시어머니의 배려였겠지만, 그 며느리는 시어머니의 영역에 대한 기득권의 행세로 여겼던가 보다. 내 며느리가 시방 그 며느리의 길을 걷는 중인가? 어느 날 큰 며느님 왈,
“어머니. 저 애기 예방접종 하러 병원을 가야 하는데, 동서한테 설거지 좀….”한다.
“내가 나서는 거보다 네가 ‘동서. 설거지 좀 부탁해.’하라” 했더니 못한단다. 이런….
그나저나 일본은 아직도 원전사고에서 벗어날 기미도 없는데, 내 둘째 며느님 모자가 출국을 할 날짜는 자꾸만 다가온다. 홀아비처럼, 기러기아빠처럼 아들을 기약도 없이 저렇게 혼자 놔 둘 수도 없는데. 둘째 며느님은 큰누나네 집에서 지내다가, 토요일엔 내 집으로 건너온다. 주일에 교회를 같이 다녀돈 뒤, 아들과 화상통화를 하고 난 며느님과의 대화 한 토막.
손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애비는 이 녀석이 얼마나 보고 싶을꼬.”하니,
“어머니. 아들도 보고 싶지만, 아들의 엄마가 더 보고 싶대요.”한다.
“….”
그녀의 한국말 수준이 조금은 어눌할 때가 있다. 시어미가 헤매는 중임을 알아차리고는,
“제가 보고 싶대요.”한다.
그녀의 말이 어눌한 게 아니었다. 그녀의 바른 표현을 알아듣지 못한 건 오히려 내 쪽이다. 이런? 이젠 제 시어미도 놀려먹을 수준이 됐구먼. 장죽의 발전이로세. 아니, 그걸 논할 때가 아니지. 이젠 보낼 차비를 해야겠구먼. ‘배운 게 도둑질’이라 하니, 내 실력을 발휘해 봐야겠구먼. 모유 수유 때문에 뒤에 지퍼가 달린 예쁜 원피스를 하나도 못 입는다고? 그려. 알았네. 내가 실력을 보여주지. 앞을 오픈을 해서 만들어주면 될 거 아닌감?! 여름에 입을 것도 두어 벌 지어 줘 봐봐? 혹…. 혹… 큰 며느님이 시기하는 건 아녀?
여보게~ 내 큰 며느님. 자네는 둘째 며느님 챙겨 보내고 나서, 차차로 더 많이 만들어 입힐 겨~!
오늘도 저~ 자리는 우리 엄마가 사수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