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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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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치를 찾아라!


BY 박예천 2014-06-13

        

                  파우치를 찾아라!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는 말은 이런 상황에 쓰는 게 맞다. 눈앞에서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바쁜 아침시간, 서둘러 눈썹을 그리고 입술연지 그어댈 때만 해도 분명 배낭 속에 챙겨 넣었다고 생각했다. 퀼트를 배운다던 지인이 꼼꼼하게 바느질하여 선물한 파우치다.

애당초 용도는 딸아이의 필통이었는데, 반강제로 내가 빼앗아 연필자루 모양의 화장품들을 담아 요긴하게 쓰던 중이었다. 혹시나 차 안에 떨어뜨렸을까 몇 번이고 이 잡듯 뒤졌다. 운전석 밑을 들여다보고 뒷좌석도 꼼꼼하게 살폈지만 눈에 띄지 않는다. 파우치백은 그렇다 치고 안에 내용물들 생각에 부아가 치민다. 유독 눈 화장에 공을 들이는 터라 돈으로 환산하면 만만치 않은 값이다. 아이라이너, 마스카라, 아이펜슬, 작은 아이새도우, 립스틱 여러 개가 눈앞에 아른거려와 입맛이 쓰다.


  이달 초부터 집에서 이십 여분 거리에 있는 군 단위 여성회관으로 강의를 들으러 다닌다. 지천명이 낼 모레인 나이에 동화구연지도사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낯선 발걸음이 두렵긴 했지만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도 신선하였고, 그 중 몇몇 분들과는 급격히 친해져 이심전심 나누던 여러 날이었다.

딱딱한 의자에 앉아 매일 서너 시간 넘게 교육받는 일은 온몸이 굳어질 만큼의 노동이지만, 서로 간 처지를 이해하며 간간히 나누는 담소와 관심어린 위로들로 힘을 얻곤 한다.

이십 명이 조금 넘는 수강생들의 연령과 생김새, 성격도 천차만별이었다. 일흔을 넘긴 할머니부터 이제 갓 서른으로 접어드는 새댁까지 다양한 인생물결이다.

중간에 주어지는 휴식시간, 화장도 고치고 얼굴상태도 살펴볼 겸 익숙하게 가방 안을 더듬었다. 손안에 만져져야 할 파우치가 없다. 강의 시작 전에 분명히 확인한 것으로 기억한다. 난처한 표정으로 가방 뒤지는걸 보더니 옆 짝꿍이 말을 건넨다.

 “뭘 그렇게 찾으세요?”

 “응, 파우치! 분명히 여기 뒀는데 없네!”

가방 구석구석 다 뒤져보고 이젠, 강의실 바닥을 훑었다. 의자 뒤편으로 떨어졌을까 고개 돌려보고 허리를 굽혀 봐도 눈에 띄질 않는다.

혼자서 끙끙거리는 꼴이 안됐는지 한 칸 건너의 수강생도 여기저기 살피며 찾느라 애를 쓴다.

 

 점심때가 훌쩍 지나 집에 도착하여 밥을 먹으려는데 식욕이 사라진다. 머릿속엔 온통 증발해버린 파우치로 꽉차있다. 얼기설기 생각의 잔가지가 늘어나 배배 꼬여가며 사건을 풀어가고 있다.

누군가 샘이 났던 거다. 얼마나 갖고 싶었으면 몰래 슬쩍 집어갔을까. 다들 나잇살이나 먹었건만 양심대로 살지 못한 어떤 인간의 소행일까. 등등. 나는 점점 치밀하게 이야기를 구성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화장품이라곤 파우치 안에 담긴 것이 다인데, 어떻게 다시 종류별로 구색 맞춰 한꺼번에 마련한단 말인가. 민낯으로 다닐 수 도 없고, 속만 쓰려온다.

거실바닥에 주저앉아 한숨을 몰아쉬려는데, 휴대전화 문자 알림음이 들린다.

반장으로 뽑힌 수강생이 수업 중 있었던 동극 실습 사진을 보내왔다. 내친김에 전화를 걸었다.

 “반장! 강의실 정리하면서 혹시, 화장품 들어있는 파우치백 못 봤어?”

 “없었어요! 항상 제가 마지막으로 점검하고 나오거든요.”

그쯤에서 정리하고 대화를 끊었어야 했다. 하지만, 파우치를 향한 나의 미련은 거침없는 의심의 언어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아무래도 누군가 슬쩍 가져간 거 같어! 여러 사람이 모인 곳이니 별 유형들이 다 있겠지?”

 “에이, 돈도 아닌데 그걸 설마요! 만약 누군가 가져간 거라면, 우리 둘만 알고 조심하기로 해요! 없어진 게 사실이면요.”

반장과 나는, 주거니 받거니 의미심장한 내용인양 만약의 상황까지 예견해가며 결론을 내렸다.

통화를 끝내고도 나는 스무 명의 수강생들 얼굴을 하나씩 떠올리며 분석하기에 이르렀다. 첫인상과 말투를 연결 짓기도 하고 몇 사람이름엔 진한 밑줄 긋기를 하기도 했다.

 

 몇 시간이 흘렀을까? 집안일 미뤄놓고 멍하니 앉아있는데, 학교에서 돌아온 아들이 피아노를 두들겨댄다. 평소 듣던 곡이 아닌 새로운 것을 열심히 연주하고 있다. 한 곡을 마무리하면 늘 하던 대로 어깨 두드려주며 칭찬메시지 후하게 날려주곤 했다. 오늘도 건반이 부서져라 무사히 곡이 끝났다. 습관처럼 일어나 아들 뒤로 가서 등을 토닥이려는데, 의자에 앉은 녀석의 엉덩이 밑으로 헝겊조각 한 부분이 삐져나와있다.

‘이게 뭐지?’ 낯익은 체크무늬배열의 천이다. 잡아당겨보니 세상에나! 파우치가 왜 거기 올라가 있는가.

허겁지겁 좀 전에 통화했던 반장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저기...., 부끄러워 어쩌냐? 파우치 찾았어! 미안해!”

 

 나보다 족히 십오 년쯤은 나이차가 있을 어린반장은 불미스러워질 상황을 미리 잠재우고자 둘만 알고 있자 했는데, 그까짓 파우치가 무엇이기에 스무 명이나 도마 위에 올려놓고 의심의 칼을 들이댔었는지 당장에 얼굴이 화끈거려왔다.

조금만 더 기다려 볼 걸 그랬다. 아니, 반장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 걸 그랬다. 때는 이미 늦어 쏟아진 말들은 너덜너덜 사람을 함부로 넘겨짚어 단정 짓고 말았다. 정말이지 파우치가 뭐 그리 대단한 물건이라고.

할 수만 있다면, 파우치 지퍼를 열고 그 속에 꼭꼭 숨어버렸음 좋겠다.

  눈꺼풀 가득 졸음 붙은 밤은 깊어만 가는데, 파우치 잃어버렸을 상황의 몇 배 무게로 가슴중앙엔 돌덩이가 내려앉는다.

내일아침 동지들을 어찌 대면한다지?

 

 

2014년 6월 12일

내 꼴이 한심스럽던 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