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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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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릿골 27 - 솜틀집


BY 박예천 2011-09-27

 

             솜틀집

 

 

 

 

기억나니?

마릿골 건너 마을 기찻길 언덕 바로 밑에 솜틀집이 있었잖아.

주일아침 예배당 가는 길이면 멈춰 서서 한참이나 바라보곤 했어.

엄마가 헌금하라고 챙겨준 동전을 바지주머니 손안에 땀이 배이도록 주물럭거리면서 말이야.

덜걱대는 솜틀기계가 마냥 신기해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단다.

울 할머니도 그러셨지.

눌리고 때 절은 묵은 솜 한 자루 그 솜틀집에 맡겨 뽀얀 뭉게구름을 만들곤 하셨어.

뭉쳐지고 딱딱했던 것이 보슬보슬 피어나 있는 걸보면 절로 웃음이 나왔지.

만지지 않고 보기만 해도 포근해졌다고 할까.

왜 영화나 광고에 그런 장면 있지?

폭신한 흰 구름위에 탄력 있게 슬로우 모션으로 몸 던져 눕는 거.

 

 

 

 

(퍼 온 사진입니다^^)

 

 

딱 내가 그 주인공이 되었으면 할 정도로 솜틀집 할아버지는 재주가 훌륭한 귀인 같았어.

솜틀기계 커다란 쇠바퀴를 연결하는 피대 줄이 팽팽해지며 돌아가면, 지켜보던 내 몸도 빳빳하게 긴장되고 마른침을 넘기곤 했어.

난 꼭 그래.

지금도 신기한 장면을 목격하면 나이를 잊고 멍하니 쳐다보게 되더라.

주일학교 어린이예배시간이 벌써 시작되었을 텐데, 자리를 뜨지 못하고 덜덜 떠는 솜틀기만 뚫어져라 쳐다봤지.

헝겊 마스크에 가려져 반 밖에 드러나지 않은 얼굴로 할아버지는 바깥마당의 관객(?)인 나를 보곤 “뭐 하러 왔냐?” 물으셨어.

몰래 훔쳐보다 들킨 것처럼 화들짝 놀라 엉뚱한 대답을 흘리고는 그제야 시간이 꽤 지난 걸 알게 되었고.

 

순간, 늦게 일어난 아침에 엄마가 한 말이 떠오르는 거야.

“결석보다는 지각이 나은 거야. 늦더라도 꼭 예배 마치고 오거라!”

예배당 나무문을 삐걱 열고 들어서면, 이미 설교는 끝나고 분반공부시간이지.

우리 반 선생님은 지각한 나를 발견하고 눈짓으로 자리에 앉으라는 표시를 보내더군.

오늘은 구약성경 다니엘에 있는 내용이래.

풀무 불에 들어갔다 살아난 ‘다니엘과 세 친구’의 내용을 가르치느라 선생님 목에 핏대가 퍼렇더라.

“사드락과 메삭과 아벤느고는 다니엘의 친구였어요!”로 시작되는 이야기.

선생님은 줄지어 앉은 우리들을 향해 또박또박 발음이 새기라도 할세라 짚어주셨어.

근데, 내 귀엔 ‘사드락!,메삭!, 아벤느고!.....,’라는 소리가 솜틀기계 박자 같더라.

왜 있잖아.

규칙적으로 오차 없이 들리는 시계소리에 가끔 딱 맞아 떨어지게 말을 붙여보는 거.

엉킨 솜을 풀어내느라 솜틀기가 빚어내는 언어들이지.

‘사드락, 메삭, 아벤느고..... 사드락, 메삭, 아벤느고......!’ 반복해서 연결된 이런 식으로.

분반공부 끝나는 내내 나는 머릿속으로 몇 지게나 될 분량의 솜을 틀고 있었던 거야.

성경 속의 인물들이 엄청나게 많을 텐데, 다니엘의 친구들만큼은 여태 잊혀 지지 않는 이름으로 기억되고 있지.

그게 다 솜틀집 덕분이지 뭐.

 

근데, 갑자기 솜틀집 얘기는 왜 하느냐고?

특별한 이유가 있나.

살면서 만져지고 부대끼는 물건들마다 추억이 묻어있다면 답이 될는지.

 

나 결혼할 때 수입품 고급냄비랑 목화솜이불을 혼수로 해왔었거든.

귀한 것이라 손님접대 할 때만 쓰려고 모셔두었지.

냄비세트도 식탁위에 오를 일이 거의 없고, 침대를 사용하고 있으니 비단 솜이불은 더더욱 덮고 잘 일이 없는 거야.

어느 날 문득,

아끼고 쟁여두고만 있는 내 꼴에 화딱지가 나더라구.

누구 좋으라고 보물처럼 간직하고만 있던 것인지.

일부러 하나씩 빼내어 요즘은 마구 쓰고 있어. 냄비들도 화사하게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놓고 그을음 묻혀가면서.

 

며칠사이 뚝 떨어진 가을기온에 어깨가 움츠러들더라.

차렵이불을 몸에 돌돌 말고 자도 한기가 가시지 않는 거야.

내친김에 장롱을 뒤져 깔끔하게 세탁해 둔 손님용 목화솜이불을 꺼내 덮었어.

딱 그 기분이었어. 어릴 적 몸을 감싸주던 온기와 누군가 포옹한 듯한 솜 무게가 전해져 오더군.

시집간 큰고모 꽃무늬이불에서 나던 고모냄새가 느껴지기도 했고.

너무 가벼워 홀라당 날아가 버릴 것 같은 가랑잎 무게 이불이 맘에 들지 않다고 생각하던 중이었어.

최고급 극세사 이불이니, 오리털이 들어간 속 재료니 해도 역시 목화솜만큼 사람체온에 맞는 게 있을까 싶어.

어젯밤, 모처럼 꿀맛 같은 숙면을 취하고 내 어릴 적 기차역전 아래 솜틀집을 떠올려 봤지.

할머니 곁에서 몇 번 손잡이 빼앗아 돌려봤던 목화 씨아도 떠오르고.

온기가 그리워지는 계절이라 그런가. 옛 추억이 더욱 새록새록 떠오르더구나.

 

헌데, 엉키고 뭉쳐진 것이 어디 묵은 솜이불뿐이겠니.

당장 내 속내부터 탈탈 솜틀기로 돌려 풀어냈으면 좋겠다.

칠십 평생, 상대방 입장 전혀 헤아리지 못하는 친정아부지 옹고집도 솜틀기계 도움을 좀 받았으면 싶고 말이야.

 

 

휴~!

지루하고 긴 얘기 들어주어 고맙다. 친구야!

 

 

 

 

2011년 9월 26일.

목화이불 덮다 솜틀집 생각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