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가 없어요!
“엄마, 애가 없어요!”
생선매운탕만 끓이면 아들은 큰 눈을 껌벅이며 곧 울 듯 한 얼굴로 중얼거린다.
냄비 속에 숟가락을 넣고 휘젓지만 걸리는 게 없다.
딸아이도 질세라 어쩌다 국물위로 떠오른 덩어리를 잽싸게 건져간다.
그쯤 되면 아들은 거의 비명수준으로 악을 쓰며 운다.
전쟁터를 방불케 할 만큼 생선찌개나 국이 식탁에 오르는 날 남매의 식탐은 치열해진다.
생선살보다 내장을 더 좋아하는 아이들이다.
어느 날인가.
생선토막 사이에 물컹한 것이 무엇이냐고 아들이 물어왔다. 어른들끼리 하던 말대로 그냥 ‘애’라고 남편이 알려줬다.
아들의 뇌리 속에 감칠맛 나는 그것의 이름이 정해진 것이다.
생선찌개를 먹는 날이면 수저도 들기 전에 ‘엄마, 애를 주세요!’라며 애타게 외친다.
우리 집 상황을 밖에서 소리로만 짐작한다면, 뉘 집 애를 저렇게도 눈물겹게 찾는가 할 것이다.
집 나가 부모 잃은 어린아이라도 있나보다 여길 정도다.
땅위에 가까워진 봄볕 따라 냉이가 솟아올랐을 거다 생각되어 가까운 들판으로 나갔다.
때마침 양양 오일장이기도 했다. 장 구경삼아 기웃거리다 칼국수 한 그릇씩 사먹었다.
값이 싼 서민음식이라며 즐겨 찾던 것인데, 오랜만에 들려서일까.
메뉴판 가격이 전부 오름세다.
진정한 서민의 음식이 사라지고 있는 게 아니냐며 남편과 몇 마디 나눴다.
싱싱한 도치 한 마리에 김치 넣고 끓여먹을까 해서 장터를 돌아다녔다.
눈에 들어오는 생선이 없다싶어 돌아 나오려는데, 허여멀건 것이 그릇에 담겨있다.
“이거, 파는 건가요?”
“도치 애인데 이천 원만 줘요!”
남편의 만류에도 아랑곳 않고 값을 치렀다.
분명 애 좋아하는 남매는 후루룩 쩝쩝 잘도 먹을 것이니까.
집에 도착하자마자 저녁준비를 한다.
다시마와 멸치로 우려낸 육수에 김장김치 송송 썰어 넣었다. 도치 애를 넣고 다시 한 번 보글보글 끓여낸다. 굵은 소금 간을 하고 파 마늘 넣어 몇 분 약불에 둔다.
시원한 맛에 군침이 절로 돈다. 녀석들 혈전이라도 벌이겠지.
나이 서너 살 더 먹은 누이도, 생각의 키가 자라지 못한 사내동생도 한 치의 양보할 맘이 생기지 않을 만큼 그 맛이 일품 인가보다.
아니나 다를까. 아예 어미는 안중에도 없다.
가운데 국 냄비를 놓고 각자의 대접에 정확이 자로 재듯 퍼 주었다.
핏줄끼리는 식성도 닮는지, 녀석들은 생선살보다 내장에 더 눈독을 들인다.
그것도 꼬불꼬불한 창자보다 넓적하게 말랑한 부분을 똑같이 탐낸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다보니 언젠가 딸아이는 이런 말을 던졌다.
“엄마! 껍질 속에 내장만으로 가득한 생선은 없을까?”
세상에나!
그건 유전자 변형이거나 기형으로 생겨난 물고기여야 가능한 것이 아니겠냐.
헌데, 너희들 남매는 알고나 있니?
질풍노도 치솟는 사춘기감정에 들쑥날쑥 변화무쌍한 딸의 심기를 살피느라 어미의 애간장이 다 녹고 있다는 것을.
열세 살 나이 먹도록 6학년이 된 것의 무게도 모르고, 수시로 애기 장난감 사달라 떼쓰는 아들 녀석 얼굴 바라보다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간다는 것을.
생선들 애만 눈 번뜩이고 찾지 말고 어미 속 좀 헤아려 줘라 이놈들아.
이제야 고백하건대, 실은 나도 부모님 애간장 다 타들어가게 꽤나 속 썩여드렸다.
자식 낳아 키워보니 그분들 사랑 깊이를 조금은 알듯하다.
은혜 갚을 날은 영영 뵈지 않고, 품안에 내 새끼들로만 애가 마른다.
성치 못한 아들의 미래를 바라보다 내쉬는 한숨이 길고 푸석하다.
오지 않은 날을 미리 걱정한들 뭐하겠는가.
애를 먹어야겠다면 어시장 돌며 생선몸통을 뒤져서라도 꺼내주면 그만이지.
나는 지금, 주어진 삶에 자족하는 법을 익히는 중이다.
애끓는 심정으로!
2011년 2월 24일
생선 애만 골라먹는 아이들 보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