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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 문간방 남자


BY 박예천 2008-12-25

 

                 문간방 남자


 

 

 

저 남자 오늘은 꽤나 피곤한가보다.

저녁밥을 준비하는 나를 본체만체하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쳐진 어깨는 소금절인 배추처럼 힘이 없어 보이고 얼굴주름 있는 대로 접혀 오만상을 하고 있다. 함께 산 세월이 길다보니 수요일이 힘든 날임을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직업이 교사인 그는 일주일 중 오늘은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빈틈없이 짜인 수업시간으로 시들게 되는 것이다.

안채를 거의 쓰다시피 하는 내가 주인행세를 하고는 있지만 등기부등본상의 실제소유자는 문간방 남자이다. 퇴근과 동시에 그 방에서 나오는 일은 거의 없다. 식욕을 해결하는 일이거나 화장실을 이용하는 경우에만 겨우 비싼 얼굴을 보여준다. 

나는 되도록 문간방 남자의 비유를 잘 맞춰주려고 노력한다. 그것은 단지 그가 우리 네 식구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다는 이유에서만은 아니다. 내가 낳고 키우는 두 아이의 아버지이기도 하고 주위사람들에게 ‘남편’이라는 이름으로 소개하는 위치 때문에라도 그에게 되도록 잘해주고 싶어진다.

 

요즘이야 내 몸이 귀찮고 챙겨야 할 일들이 많아졌다는 핑계로 문간방 남자에 대한 배려가 소홀해졌지만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지극 정성으로 섬겼다. 나 스스로의 주관적인 해석이 아니고 문간방 남자가 자기 입으로 사방에 소문내고 다닌 부분이기에 당당하게 말 할 수 있다. 퇴근하여 돌아오면 따뜻한 물을 대야에 받아 손수 발을 닦아주었으며 손톱과 발톱까지 일일이 깎아주기도 했다. 하늘같이 대하라는 말을 실천하려고 애쓴 것은 아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왔고 파김치가 되어 돌아오는 그가 측은해지고 안쓰러웠다. 국어교사이고 보니 하루 종일 목이 터져라 외쳐댔을 입을 조금 쉬게 해 주고 싶었다. 잔소리도 줄이고 혼자 있고 싶어 하면 자리 피해주며 편하게 해주었다.

 

신혼시절 어느 부부와 마찬가지로 잦은 의견대립이 있었다. 부부싸움의 원인이야 늘 사소한곳에서 시작되지만 언제나 승자는 남편이고 나는 고개 숙인 패잔병 꼴로 풀죽어 울곤 했다. 오래된 일인데도 금방 일어난 것처럼 웃음을 떠올리게 되는 이야기가 있다.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다분히 다혈질인 나와는 반대로 문간방 남자의 성격은 차분한데다가 이성적이기까지 해서 언제나 일방적으로 내 쪽에서 먼저 백기를 든다.

작은 다툼으로 인해 새침해있는 나에게 며칠 동안 한마디 말도 하지 않던 그가 차나 한잔 하자며 자리를 마련한다. 화가 풀리지 않아 볼이 부어있는 나를 상대로 일목요연하게 사건의 개요부터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한다. 서론, 본론, 결론으로 나누어 얼마나 길게 말을 이어가는지 다리에 쥐가 날 정도였다. 중간에 듣고 있던 내용이 불만스러워 말을 가르며 한마디 내밀려고 해봤다.

 “말 자르지 말고 다 듣고 질문해.” 이렇게 말하는 남편은 가르치는 교사이고 나는 배움의 학생위치였다.

길고 긴말을 다 듣고 나니“이제 당신 말해봐. 뭐 불만 있어?”라고 묻는데, 분명히 속내 가득했던 요구사항들이 한 가지도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장시간의 남편 수업을 받은 아내는 볼멘소리로 울먹이며 억울하게 물러서고 말았다. 

그런 남편에게 익숙해졌는지 이제는 내가 며칠이고 생각을 거듭한 후 낮은 음성으로 차한잔 나누자는 말을 건네게 되었다. 부부는 닮는다더니 남편이 오히려 토라지는 계집애처럼 되었으니 입가에 미소 지을 일이 아닌가.

 

문간방을 들여다보면 겨우 한사람정도 누울만한 공간 외에 벽면 가득히 꽂혀있는 것이 책들이다. 방바닥 중앙에 노트북 한 개 놓여있고 창 밑으로는 또 한 대의 컴퓨터와 음악, 영화를 함께 감상할 수 있는 최신형 장비들이 오목조목 설치되어 있다.

연애시절 내가 그에게 반한 여러 이유 중에 하나가 어느 분야든 막힘없이 가지고 있는 해박함 때문이기도 했다. 함께 살면서 또 하나 놀란 것은 방대한 독서량이다. 설마 저 많은 책들을 다 읽었을 리 만무하다 싶었고 장식용이겠지 했다. 손때 묻은 고서에서부터 최신작까지 다양하게 읽어대는 그가 위대해 보였다.


하숙집 아줌마 꼴인 내게 얼마 전부터 그는 다양한 배려를 한다. 퉁명스럽고 내 하는 일에 관심조차 없는 것 같더니 글을 써보라며 굳은 감상을 쿡쿡 찔러대는 것이다.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불가능하고 자신 없다 피했으나 자꾸 시도해보기를 권한다. 학창시절 문예반에 있으면서 상이야 받아봤지만 감히 글을 써보겠다는 생각은 못하고 살았었다. 거의 십 년 넘게 일기만 쓰는 게 고작이었고 아들녀석 두 돌 되던 해에 한글날이던가 속초에서 열렸던 백일장에 나가 상을 타기는 했다. 받아온 상장을 문간방 책장 위에 펼쳐놓고 장난스레 좋아하던 기억이 난다. 몇 달 전에도 우연한 기회로 방송을 탔던 글을 가족홈페이지에 올려놓고, 여기저기 전화를 하던 팔불출 남편이었다.

 “나는 멀었어. 당신처럼 책도 많이 못 읽었는데 무슨 글을 쓰겠어.”  

 “아무리 많이 읽었으면 뭐해? 계속해서 써온 사람한테는 못 당하는 거야. 당신은 할 수 있어” 

 기특한 문간방 남자 같으니. 때로 이렇게 나에게 자신감을 주는 말도 할 줄 아는 사려 깊은 남자였구나. 정성 들여 밥해 먹이고 옷 빨아 입힌 보람이 있었다.

그 후로 문간방 남자는 이곳저곳 인터넷을 뒤지더니 혼자만 글써놓으면 뭐 하느냐 다른 이들의 평도 듣고 충고도 받아야 된다며 소개를 해준다. 컴퓨터를 모르는 안주인을 위해 쉬운 말로 풀이해주면서 즐겨 찾기에 옮겨놓기까지 한다.

아이들을 재운 후 늦은 밤까지 먹먹해진 글줄을 퍼 올리느라 불편한 자세로 앉아 있다 보니  여간 허리가 아픈 게 아니다. 나도 모르게 주먹으로 등을 펑펑 두드리며 있는 모습을 보았는지 어느 날인가 불쑥 이렇게 말한다.

 “애들 방 한구석 치워놔,  컴퓨터 설치해줄게.”

어디서 주워 왔을까. 고물 같은 부품들을 잘도 조립해서 훌륭한 자리 마련해 주었다. 밤만 되면 문간방 남자는 자기 방에서 나는 앉은뱅이 컴퓨터책상을 끼고 자판을 두드린다.

 

요즘은 부족한 내 문학적 지식을 일깨워 주려는 의도인지 책을 한 권씩 읽으라며 건넨다. 버스 안에서 혹은 아들의 치료 중 대기실에서 읽는 것이 고작이건만 말 안 듣는 학생 지도하듯 어디까지 읽었느냐고 중간검사까지 한다. 최대한 안주인의 수고를 고려해가면서 강요하지 않고 기다려줌이 미안해져 오늘은 흔들리는 차안에서 졸음참고 꽤 오래 읽었다.


여기까지 적어놓은 내 글을 다시 보니 어느새 내가 팔불출 아내 꼴이 되고 말았다.

시작 글은 문간방 남자에게 으름장을 놓으며 “방 빼!” 하고 싶었는데 방향이 잘못 잡혔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해본다. 평생을 같이 살아야 할 남자인데 살면서 질리지 않으니 다행이라고. 의복이나 장신구는 오래 지니고 있으면 유행이지나 새로운 것을 찾기 마련이 아닌가.

그런데 정말 큰일이다. 연애시절엔 저 남자가 애걸복걸 나를 따라다녔는데 안주인 체면이 말이 아니다. 슬슬 문간방 남자를 존경하는 마음이 생기기 시작한다.

아마도 나는 평생 동안 문간방 남자에게 방을 빼 달라는 말 못 할 것 같다.



2003년 8월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