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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 이런 남자!


BY 박예천 2008-12-25

 

이런 남자와 살고있다.


 

결혼을 하고 아이 낳아 살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철저한 독신주의자임을 스스로 부르짖으며 영화의 제목처럼 결혼은 미친 짓이라고 외치던 사람이었다. 이십대 중반의 나이가 되면서 서서히 노후설계와 미래를 계획 할 정도로 치밀하게 준비 작업을 했었다. 공부를 더 하고 싶었고 사명감 갖고 임했던 유치원교사 일이 마음에 들었다. 나이 지긋하며 인상 좋은 유치원 원장님이 된 내 모습을 자주 꿈속에 그려 넣곤 했다.  

눈에 콩 꺼풀이 뒤집어 씌웠다는 말이 있던가.

꼭 내가 그 꼴이 되어 지금의 남편과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고집스런 결혼을 하게 되었다. 


유치원 근무당시 나는 새로운 시도를 하기 좋아하는 모험심 많은 교사로 알려져 있었다.

다른 교사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일을 시작하여 고생을 사서한다는 동료들의 뭇 욕을 먹었으나 실험정신 강한 교사라는 원장님의 칭찬을 듣기도 하였다.

시행착오가 있더라도 직접 부딪혀보자는 것이 나의 소신이었고, 적당히 시키는 일만 해도 월급 제때 나오는 시립인데 힘들게 나서지 않겠다는 것이 나머지 교사들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나는 늘 귀와 뒤통수가 따갑도록 눈총을 받고 근무했다. 그런 모든 가시들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안으로 채워지는 나 혼자만의 충만한 결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근무했던 유치원은 시에서 직영으로 운영하던 곳이라서 시설이나 재정적인 지원이 튼튼했던 곳이다. 그야말로 애써 몸부림치지 않아도 적당히 제 구실만 하면 생계에 지장은 없었다. 하지만 내 젊은 꿈틀거림은 가만히 멈춰있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곳을 그만 둔지 오래여서  모든 일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몇 가지 떠올려 본다.


유치원 앞으로 잔디를 심어놓은 작은 뜰이 있었다.

비만 조금 내리면 진흙바닥이 되고 빗물이 제대로 빠지지 않아 물을 밖으로 퍼냈었다.

근본적인 대책도 없이 내리는 빗줄기 앞에 양동이며 대야를 들고 지하실에서부터 물을 퍼 나르던 그 답답함에 내가 반기를 들었다.

주임교사도 버젓이 있고 경력도 적은 평교사 주제에 감히 엄청난 용기를 낸 것이다.

잔디를 모두 뽑아내고 텃밭을 만들자는 의견을 낸 것이다.

비가 잘 빠지도록 도랑을 밖으로 나게 한 후 돌을 고르고 흙을 갈아엎어 열 개 반에 분양하자는 맹랑한 제안을 했다. 나누어진 밭에 각 반별로 채소와 화초를 심고 가꾸어 관찰하면 아이들에게 근사한 선물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의견을 내본 것이다. 

소녀 같은 원장님이 박수를 치며 좋아하신 것까지는 그럴싸하게 어깨가 우쭐했는데, 아홉 쌍의 눈동자들이 일제히 내 몸 구석구석을 째려 볼 때는 난처해지기도 했다.


다음날부터 근무가 끝나기 무섭게 밭이 될 공간을 열 등분하고 반별로 돌을 골라내느라 진땀을 흘렸다. 고생한 보람은 있어 상추가 자라고 갖가지 열매 달린 채소들이 제 역할을 감당해내기 시작했다. 모래장난을 하던 아이들을 끌고 손으로 만져가며“이게 고추야, 저건 가지란다”하며 들떠 웃음 짓곤 했다.


교사들 전부가 여자이고 보니 손에 망치를 들고 못질을 하는 일은 예사였다. 지금 생각해도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다른 일에는 꽤나 겁이 많은 내가 당시는 왜 그리도 용감무쌍한 모습이었는지 모르겠다.

나무판자 잘라내어 새로운 것 만들고 전기선을 마구 연결했으며 화장실 안까지도 헤집고 다녔다. 물이 내려가지 않는 양변기 뒷부분도 뜯어보고 여기저기 다니며 가만히 있지를 않았다. 상황이 그쯤 되니까 원장님은 유치원에서 고장 난 물건만 있으면 방송으로 나를 부르신다. 복사기 작동이 되지 않거나 전화기가 망가져도 나를 호출하신다. 지금도 잊지 못할 엄청난 기억은 지하에 거대한 보일러가 고장 났을 때도 멈춰버린 그것을 내가 해결해 줄 것으로 믿으며 간절히 매달리는 원장님 표정이다. 정말 이번엔 불가능한 일이므로 난감했다.

내가 무슨 맥가이버 손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더 놀라운 일은 나중에 벌어졌다. 이것저것 눌러보고 끼워보고 하다 보니, 어느 순간 보일러가 다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쯤 되니 영웅처럼 내 위치가 바뀌어 버렸다.

평소 친분이 있으신 주임교사가 나에게 조용히 다가오더니 하는 말.

“박 선생 결혼하면 절대로 그런 일들 못하는척하고 살아. 여자가 너무 그러면 남자가 손 하나 까닥 안 한단 말야. 알았지?”

그 말을 뇌리에 새기고 가슴에 꼭 담아 두었다.


결혼을 하고 지금의 남편을 만나 살다보니 입이 떡 벌어지도록 어이없는 일들이 자주 일어난다. 평소 눈감고 쉽게 해버린 일도 남편은 온 시선을 집중시켜 끙끙대지만 처리하지 못한다.

사진을 걸고 싶어서 벽에 못질 좀 해달라고 했다. 시멘트 못을 박으려면 펜치로 못을 고정시키듯 잡고 망치로 내리쳐야하는데 그냥 맨손으로 못을 잡고 있으니. 확 빼앗아 보란 듯이 해 보이고 싶었지만 그래도 명색이 남편이니 기를 살려줘야 하지 않은가. 꿋꿋이 지켜보며 참았다.

방마다 벽지 구멍만 잔뜩 내어놓고 못 박기를 포기한 남편은 접착 식 고리를 사서 붙여 놓았다. 처음 얼마간이야 잘 붙어있었지. 잠을 자다가 한 밤중에 침대 머리맡으로 떨어지던 신혼여행 사진 액자에 깔려 죽을 뻔했다. 며칠 뒤엔 아이들 방과 거실에서 ‘쿵’하는 굉음이 연속으로 들려오는 것이다. 속으로는 불이 치솟듯 기가 막혔다.

연애시절 미리 못 박는 테스트라도 해볼걸. 가장 기본적인 남자 일에 쩔쩔매는 사람일 줄이야.  다음날 아침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하며 떨어진 액자들에게 미안한 것인지, 못질 못하는 남편 된 것이 부끄러웠는지 “사진 너무 많이 걸어 놓으니 집이 좁아 보인다.”는 묻지도 않은 설명을 액자대신 내 얼굴 앞에 걸며 사진들을 한곳 구석으로 몰아 치우는 것이다. 겨우 가족사진 하나 걸린 거실도 천장부분 나무에 못을 밖아 끈으로 내려 걸었으니 손으로 건드리면 가족들이 사진 속에서 시계추처럼 좌우로 춤을 춘다.


이쯤으로 내 남편 남자 됨의 부실함을 끝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일은 사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재 살고 있는 아파트에 이사 오면서부터 사용하던 주방 싱크대에 수도가 말썽을 부린다.

벌써 한 달 전쯤부터 앵무새처럼 노래를 불러도 귀에 솜 마개를 붙였는지 미동도 않는다.

그러다가 식료품 떨어진 것을 구입하러 대형마트에 가면서 사 만원 가까이 하는 거금을 주고 수도꼭지 세트를 사왔다. 교체만 하면 된다고 큰소리를 치는 남편의 어깨 세움에 슬슬 겁이 나기 시작한다. 소리가 크면 끝이 좋지 않는 결과로 남았던 옛일들이 떠올랐다.

사실 수도손잡이도 멀쩡했고 물줄기 조절하는 플라스틱 부분과 금속이 만나는 곳이 부러졌으니 간단한 부속만 갈면 될 것 같았다. 뭐 하러 세트로 사느냐는 말이 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리는 것을 속으로 참느라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내가 한마디 하게 되면 남편의 자존심에 금이 가기에 적당히 기를 세워주고 싶었다. 언제나 그러했듯이 무슨 일을 부탁하면 후회가 생기도록 만든다. ‘이것 가져와라’, ‘여기 붙들어라’를 노랫말처럼 반복하며 더 많은 움직임을 요구한다.

차라리 내가 고치고 말 것을 이 무슨 사서고생이냐고 가슴팍을 쳐대며 이를 악물고 만다.


아니나 다를까. 시작부터 느낌이 좋지 않다.

복도까지 나가서 수도밸브를 조여라 열어라 하는 심부름을 이십 번은 족히 했을 것이다.

다 되었는가 싶으면 물이 줄줄 새고 현관문을 열고 쥐구멍 드나들 듯 오가면서도 틈틈이 바닥에 흥건한 물을 훔치느라 바쁜 내 모습이 되고 말았다.

아! 차라리 수도꼭지가 녹이 슬어 바스러지더라도 그냥 쓸 것을 그랬다.

밤 열한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에 뚫어져라 물 꼭지만 쳐다보는 남자나 무릎 꿇고 바닥을 닦다 밸브 잠그러 뛰어나가는 여자인 이런 상황이 될 줄은 몰랐다.       

드디어 어찌어찌 하다가 물이 새지 않고 제대로 나오게 되자 후기인상파로 얼굴 찡그리던 남편이 어깨관절을 쫙 펴더니 “이거 잘 쓰란 말이야. 갑자기 세차게 탁탁 내려놓지 말고 알았어?” 하며 학생 훈계하는 본연의 교사목소리로 말한다.

말대꾸 하고 싶어서 배배 꼬이는 혀를 펴느라 애꿎은 두 입술만 피나게 물었다.

과정이야 어떻든 물만 나오면 그만 이라는 생각으로 피곤한 잠이 부르는 밤 속으로 골아 떨어졌다.


이튿날 아이의 밥을 챙겨주러 먼저 일어난 나는 기함을 할 뻔했다.

거실바닥이 온통 수재 당한 집 풍경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걸레로는 부족하여 대야를 동원하고 퍼 담을 정도여서 마구 속상해지기 시작했다. 

유치원 지하실에 차오르던 물을 곰팡내 맡으며 퍼내던 일이 떠올랐다.

남편을 깨워 그 상황을 보여주니 말없이 철물점으로 가서는 재료를 다시 구입해오고 손을 보기 시작한다. 어제 밤 부려먹은 잔심부름이 미안했던지 직접 복도로 나가 잠그고 오가며 아침부터 수도꼭지에 머리를 맞대고 있다. 어느 정도 거실바닥이 평정을 찾았을 때 싱크대 앞에서 돌아서 걷는 남편의 한숨소리를 듣는다.  

완전히 해결되었다는 만족스런 표정을 보며 나도 덩달아 가슴을 쓸어 내렸다.


아들이 감각치료 할 동안 대기실에 앉아 책을 보는 내 머릿속으로 글의 내용은 하나도 걸리지 않는다.

우리 집 거실에 물이 가득하여 가구며 세간들이 둥둥 떠다니는 끔찍한 그림만 불안하게 떠  오르는 것이다. 집에 도착하는 내내 그것만 걱정되어 현관문을 여는 손목에 힘이 빠질 정도였다. 

다행이 거실바닥은 뽀송뽀송했다.

옷을 채 갈아입지도 않았는데 남편으로부터 전화가 온다.

“수도 어때? 괜찮은가. 물새지 않았지?”  

학교에서 수업하는 내내 남편도 나처럼 그 걱정을 하고 있었나보다.


무엇하나 척척 고치지 못하는 남편을 향해 일침을 놓은 적이 있었다. 

“당신은 백날 연구나 하고 아이들 가르치는 일이 제격이니 다른 것은 할 생각도 하지 마세요.”

수도꼭지 제대로 고쳐주지 못하는 남편일지라도 훌륭한 교사이면 되겠다.

사랑해줄 가치 있는 남자로 인정하마.

 

근데, 이런 남자 계속 데리고 살아야 하나?

 

 

2003년 여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