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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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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판.


BY 솔바람소리 2010-02-19

전날 내린 눈이 빙판을 이룬 골목을 걷는 순간 문득, 시도 때도 없이 미끄러지고 자빠지는 변덕스런 마음에 비유됐다.

17년 동안 가정을 지키고 있던 내가 고작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달랑 타자 400타 정도의 실력. 휑하니 허전한 이력서 한 면을 채우기 위해 출판했던 책의 이름과 글을 쓰며 받았던 수상 경력들, TV출연까지 구차스러울 정도로 모든 것들을 낱낱이 채워가며 적어내었다. 그렇게 사십이라는 걸림돌 나이를 들고서 3곳에 이력서를 내었다.

운도 좋게 세 곳에서 모두 면접을 오라는 연락을 받았지만 집에서 지하철로 두정거장 떨어진 가장 가까운 <~홈쇼핑>본사를 선택하여 찾아가게 되었다.

현대적으로 꾸며진 웅장한 건물 안으로 들어 설 때에도 겁이 없었다. 지하 6층에 위치했던 1:1 면접 실을 찾아 들어갔을 때에도 덤덤했었다.

“나이가 적지 않은데... 이 일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닌데... 하실 수 있겠습니까?”

날카로운 눈매의 면접관이 대뜸 던진 말이었다. 40이라는 나이가 적은 나이는 아니지만 그렇게 많은 나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기에 여전히 기죽지 않았던 나,

“쉽게 생각하고 이력서를 내지 않았습니다. 오랫동안 가정만 지키고 있었기에 사회성에 대한 감이 떨어졌을 수도 있겠지만 열심히 해보며 저 자신도 스스로를 테스트 해보고 싶어요.”

목소리도 당당히 대꾸했었다.

“이 일은 상품에 대한 파악도 해야 하고, 전산처리도 복잡하고, 고객을 응대하기 위한 정보도 찾아야 합니다. 그때그때 대처하는 상황이 긴박합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앉아 있어야 하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남들 하는 일이면 저도 할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서서 있는 것보다 차라리 앉아서 하는 일이 편할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척추장애 5급에 대한 사전 통보가 있었기에 면접관이 물어준 말에 발끈에 가깝도록 힘주어 대꾸 했었다.

그런 며칠 후부터 교육생이란 명목 하에 3주 동안 교육과 시험을 봐야했던 연속적인 날을 보내게 되었다. 평균 연령 30이라는 동기들이 어리게는 20대 초반부터 많게는 30대 중반이었다. 대부분 저마다 하나같이 상담원의 경력을 지니고들 있었다. 그들에게 뒤지지 않기 위해 사회초보자의 자리에서 고시생이라도 된 냥 잠을 2시간도 채 자지 못하며 이론공부를 해야 했고 꼬박꼬박 만점을 받아냈었다. 똑같이 듣는 수업이었지만 젊은이들의 이해력에 뒤처지는 나 자신을 깨달았고 그럴수록 악착을 떨어댔지만 속으로 단단히 품고 있던 자존심바위가 쪼개지고 쪼개지더니 자갈처럼 부서져 내림을 절감해갔다.

실습에 돌입한 순간엔 모래가 되어 흩어지는 자신감에 절망적이 되기도 했다. 30도 채 되지 않은 앳된 강사의 잔소리를 들어야 했던 순간엔 다른 교육생처럼 눈물이라도 흘릴 수 없는 40이라는 나이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갖은 우여곡절 끝에 파트에 투입되었지만, 지원했던 인원수의 절반이 포기를 했을 정도로 고된 시간을 이겨낸 순간이었지만, 결코 기뻐할 수만 없을 정도로 업무는 복잡했고 고되었다.

면접관이 첫 대면에서 던져댔던 질문들에 무식하게 용감 떨며 대꾸했던 지난 말들이 부끄러울 정도로.

TV홈쇼핑 텔레마케터가 아닌, 지원했던 <인터넷>텔레마케터의 월급이 5만원 높았던 이유가 뭐였는지 파악되던 나날 속에서 사회에 첫발을 내딛기 전에 온갖 고난에도 포기하지 않으리라, 지녔던 ‘초심을 잃지 말자’와 ‘결국 견뎌내지 못할 거라면 빠른 포기가 낫지 않을까’ 사이에서 빙판 위에 놓인 양 미끄덩거렸다.

“고객님 반갑습니다...”

가증스러울 정도로 상냥한 목소리로 시작된 말이 40분을 족히 물고 늘어지는 진상의 고객을 대할 때나, 하나의 컴퓨터 모니터에 4~5개의 전산화면을 동시에 올려놓고 확인과 대처를 해가며 타이프로 기록을 남겨야 하는 복잡하고 고된 순간이나 어떤 것도 만만하지 않은 시간을 맞이하면서도 포기할 수 없던 오기들로 견뎌내고 있는 중이다... 그건 목숨보다 소중한 자식들을 책임져야 한다는, 그 이유 딱 한 가지 때문이리라.

이제 시작인 순간이다.

여기서 포기하면 결코 어디서도 견뎌낼 수 없는 나약한 인간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더는 기댈 곳이 없다. 기대서도 안 된다. 물러설 곳이 없다. 물러서서도 안 된다. 나는 단순한 내가 아니다. 보통의 여자가 아니다. 강해야 할 자식들의 엄마일 뿐이다. 바위가 자갈이 되고 모래가 되고 먼지가 되더라도 세상을 떠나지 못하는 존재로 견뎌내야 할 것이다.

“언니의 당당함이 부러워요...”

“누나는 사회운동가 같아요...”

속으로 전전긍긍, 노심초사, 피눈물을 흘려대는 진무른 마음을 보이지 않고 견뎌내는 나를... 철부지 어린 아이처럼 기특하다는 칭찬이라도 듣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