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저녁이 가까운 시간에 자식남매의 말다툼이 또다시 벌어졌다. 일요일, 오늘만 해도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른다. 동생에게 한 치 양보 없는 아들이나 말 한 자락 지지 않는 딸이나, 둘의 잘못을 잴 수 있는 양팔저울이 있다면 어느 쪽으로도 치우침이 없겠다. 놀 토가 낀 이틀의 연휴가 있던 날이면 집구석만 지키고 있던 남매의 신경전이 극에 달하곤 했다. 집 안팎으로 저들에게도 쌓였을 스트레스가 해소되지 못하고 부딪쳐 스파크를 내는 것만 같다. 그런 마음으로 꾸중을 했다가도 금방 속으로 미안함을 삭여야만 했던 무능력한 어미는 ‘쳇바퀴 같은 일상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삶이 나부터도 무료함과 무기력 사이에서 허덕이며 마음 가득 짜증으로 물들고 마는데 아이들인들 어떨 라고.’ 마음만 반성의 끝자락을 붙잡고 있을 뿐 행동의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했다.
남매의 어미는 무료함에 젖어 TV 앞에 앉아있는 자식들의 두통수를 보며 불가능할 것만 같은 상상력을 펼칠 때가 종종 있다.
-메이커는 아니지만 엣지있는 차림새의 어미와 남매가 경차의 트렁크에 피크닉바구니를 실고 주일마다 근교를 찾는다. 어미는 자식들에게 세상 모두를 보여줄 순 없다는 안타까움 따위에 연연하지 않고 그것과 견줄만한 좋은 볼거리를 찾아서 견문을 넓혀 주기에 주력한다. 이상적인 어미는 결코 성낼 줄 모르며 온화한 얼굴로 자식들을 대하는 것으로 자연스레 사랑과 관용의 인성을 학습 시켰다.-
하지만 상상이 아닌 현실의 어미에겐 마음의 여유는 고갈 직전. 얼굴 미간으로 내천(川)자를 깊게 새긴 채로 언성을 높이기 일쑤다.
아침 8시가 가까운 시간에 식사를 마친 뒤 딸의 표정이 심상찮았다. 심통 가득한 얼굴이었지만 그 이유를 늘어놓진 않았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창밖을 내다보더니 뾰로통한 입으로 겨우 한마디 한다.
“비가 오지 않는데...”
끝맺음이 없는 말의 끝자락이 희한하게도 어미의 귓가에서 이리 메아리쳐대고 있었다.
‘엄마 말이 틀렸잖아요. 어제 조조할인영화라도 좋으니 보여 달라고 했더니 비가 온다면서요. 봐요. 비는 한 자락도 오지 않는다구요. 보여주기 싫어서 핑계를 대셨던 거지요?’
딸의 소리 없는 항의에 묵묵히, 무신경한 척 응대했지만 어미의 시선은 잔뜩 흐린 딸의 행동을 조용히 쫒고 있었다. 안방 침대에 모로 누워 이불을 뒤집어쓰는 딸을 봤을 땐 어미로써의 면목이 지구를 떠나고 없을 지경이 되었다. 어미도 딸이 방금 전에 섰던 창가로 다가가 봤다. 비가 온다던 하늘엔 회색구름이 가득 널려 있을 뿐, 나뭇가지에 매달린 마른 잎 새가 잔바람에 바스락 거리며 뽀송뽀송 건조한 날씨를 고하고 있었다.
이 주일에 한번쯤 영화를 보여준다던 약속을 <국가대표>를 끝으로 지키지 못했다. 휴일을 이른 아침부터 설쳐야 볼 수 있던 조조할인 영화였지만 충분히 감수할 수 있다며 하얀 치아를 들어내며 웃던 딸과의 약속을 신의가 참으로 중요한 거라던 어미가 그것을 어기고 있던 차였고 그것이 마음에 걸리던 순간들이었다. 더욱 힘겨워진 가계형편을 이유로 양해를 구했던 부분이지만 아이의 생각이 어른의 걱정을 따를 리는 만무였는가 보다. 어른의 무성의한 이기심으로 불만조차 터트리지 못하는 어린 딸을 만든 것 같은 죄책감이 들었다. 더는 핑계로 미루지 말고 영화관으로 가야 했다. 아침 일찍 서두르는 것이 버겁다는 아들을 나두고서 딸과 함께 볼 수 있는 영화를 찾아서 인터넷을 검색했다. 아들이 CG효과가 사실적이라는 친구들의 소감을 들었다며<2012>를 추천해준다. 지구멸망이라는 가공할만한 소재가 걸리긴 했지만 어떤 희망적인 결말에 도달할지 지켜보는 것도 괜찮을 듯하여 그 말을 따르기로 했다. 일반 9천원, 청소년 6천원, 반값의 조조할인을 적용받다가 제값을 내려니 과하단 생각이 들었지만 10시 25분 타임으로 예매를 했다. 1시간 20분이라는 촉박한 시간을 남겨두고 갑작스레 만든 계획 앞에 분주히 움직여야 했지만 언제 그늘이 졌었냐는 듯 밝아진 표정의 딸을 위안 삼으며 함께 각자의 자전거에 올라타고 4km 거리를 오랜만에 힘차게 달렸다. 혹시 몰라 챙긴 하나뿐인 비옷을 부디 사용하지 않길 바라며.
영화는 초입부터 미국 도심을 시작으로 하늘과 땅의 구분이 없어졌다. 지진이 일어난 땅이 커다란 계곡처럼 갈라졌고 사람을 비롯해서 거대한 건물들까지, 땅 위에 있던 모든 것들이 끝도 없을 것 같은 그 속으로 끝없이 곤두박질 쳤다. 세계 곳곳에서 거대한 화산이 터졌고 함박눈 같은 화산재가 쏟아져 내렸다. 상상을 초월하는 해일이 또 세상 모든 것을 서서히 삼켜버렸다. 내용의 전반이 피할 수 없는 재앙 앞에서 소수의 가진 자와 대다수의 그렇지 않은 자들이 극과 극인 상황에서 지구멸망을 대처하거나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묘사를 그려갔다. 1인당 10억 달러라고 했던가? 우주선모양의 방주를 탑승할 수 있던 삯이 그러했던 것 같다. 욕심 많고 이기적이던 갑부나, 서민의 부모나 지구멸망이란 죽음의 문턱 앞에 자식만은 살려야 한다는 보호본능 앞에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기도 했다. 영화의 결말에 도달 할 쯤엔 희생적으로 죽어간 사람들을 지켜보던 이기적인 사람의 마음도 감동으로 물들었고 결국 화합의 한마음이 되어 재난을 해쳐나갔다. 결국 지구는 대부분이 바다 속으로 잠겨버렸다. 세상 대부분의 인류가 대참사로 사라졌지만 신의 혜택을 받은 듯 살아남아서 안도의 기쁨을 누리는 소수의 인간과 동물들이 건재한 모습으로 남아있다는 사막의 어느 지역을(영화의 빠른 전개와 뒤따라주지 않는 나의 뇌기능으로 인하여 등장인물의 이름이나 지명을 언급할 수 없다는 것이 아쉽다.) 향한 항해가 계속되었다. 영화는 새로운 시작을 암시하며 막을 내렸다.
영화 관람자의 입장이었지만 사실적으로 표현된 CG영상의 꾸며진 재앙 앞에서 공포에 싸인 채로 죽음을 맞아야 했던 내용속의 한 인물이 되어 절망과 포기를 공유하게 했다. 긴장감으로 꼭 쥐었던 건성의 손바닥 안이 땀으로 젖은 줄도 모른 채 가슴을 졸이기도 했다. 영화 속의 한 인물이 되어 자식들을 살려야 한다는 절박함을 지녔던 한부분에선 나도 저런 희생을 보여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져보기도 했다.
막 내린 영화의 감회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객석을 빠져나오는데 딸이 한쪽 팔을 잡고 다가와서 귓가에 입을 댔다.
“엄마, 정말 재밌었어요.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려요... 아... 또 보고 싶다. 다음엔 우리 예고했던 <아바타> 보러 와요.”
영화관 입구를 들어서기도 전부터 달콤한 향기로 코를 유혹하던 팝콘하나 사서 들려주는 대신 집에 있던 강냉이를 들고 와서 안겨준 매정한 어미에게 구김살 없이 말해 주는 딸이 오히려 가슴 아파서 ‘철딱서니’를 운운할 수가 없었다.
“그래... 그때 상황한번 보자.”
올 때만해도 잔뜩 건조했던 밖엔 걱정했던 대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란히 붙어있던 자전거 두 대가 빗물에 흠뻑 젖어 있었다. 그런 상황을 예견하지 못했다는 듯 당황한 표정이 된 딸내미 눈빛이 미안함으로 가득 찼다. ‘봐봐. 비 오지? 엄마 말이 틀리지 않았잖아...’ 평소의 잔소리 많은 어미라면 열 두 마디도 더 뱉어냈을 말들이지만 그 순간을 표정 없이 묵묵히 있었다. 방금 전까지 봤던 영화내용과 비교한다면 이런 상황은 코끼리 발바닥에 작은 티끌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어쩔 수 없는 피곤이 몰려들었다. 줄기차게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 절약의 수단으로 끌고 왔던 자전거 두 대를 택시나 지하철을 탈 수도 없게 만드는 애물단지로 절락시키며 괜히 가져왔다는 후회를 안고서도 데리러 와달라고 연락할 수 있는 남편이 없다는 것이 뇌리 가득 피곤함으로 물들게 했다. 피하지 못하면 즐기라고 했던가. 내게서 어느 순간 사라져간 자신감을 찾아보았다. 하지만...
챙겨갔던 하나뿐인 긴 망토식의 비옷을 딸에게 입혀주고 딸이 끼고 있던 털장갑을 벗긴 손에 방수가 되는 어미의 장갑을 끼어주었다. 그런 어미에게 딸이 말한다. 더워서 비를 맞고 싶다고... 눈물이 핑 돌 것 같았지만 눈을 몇 번 깜빡이는 것으로 말려 버렸다. ‘비를 맞을 수 있는 영광을 어미에게 넘기렴.’ 농담을 던지며 딸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주지 못하는 자신을 내심 경멸하며 입혔던 비옷 매무새를 단단히 고쳐 주었다. 그런 어미에게 딸이 또 한마디 던졌다.
“엄마... 나 불효하는 딸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