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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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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래떡을 먹다.(1)


BY 솔바람소리 2009-03-30


27년 전,

그해가 유난히 매서웠던 겨울로 지금까지 내 기억창고에 남아있다.

할머니께서 꺼트린 적 없는 활활 타오르는 연탄불 땐 온돌방에

누워서 챙겨주신 간식을 동생들과 오붓하게 먹으면서도 굵은 눈발을

날리는 바람에 애가 탔던 밤이면 초록 페인트칠 대문을 활짝 열고 서서

한쪽 방향을 주시해야 했던 밤을 보냈던 기억과 함께.

 

초등 5학년 1학기가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던 것 같다.

입학해서 한 번도 반을 가르지 않았기에 맘 맞는 아이들과 늘 함께 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여기며 변함없는 일상 속에서도 운동장을 뛰놀고

학교 뒷산을 탐방하며 맘 맞는 친구끼리 비밀아지트를 짓기도 했던,

무료할 상황과 맞서듯 놀이연구에 여념 없을 당시이기도 했다.

 

내게 얻어맞은 머슴아들에게 이름보다 ‘깡패’라고 불릴 때가 많았던 어느 날,

남학생 하나가 전학을 왔다.

 

또래 아이보다 키가 훌쩍 컸던 그 녀석은 야구를 좋아하는지 야구점퍼와

모자를 쓰고 있었다. (지금은 서울 도심의 학교를 다니다가 내려왔다는 그

녀석의 이름이 생각나지는 않는다.) 서울에서 내려왔다는 선생님의 말씀으로

우리들의 호기심에 불을 지폈고, 그 관심은 쉬는 시간마다 녀석의 자리로 북새통을

이루게 했다.

 

첫날부터 새로운 낯선 곳일 텐데도 그 녀석, 주눅 들지 않은 모습으로,

오히려 짓궂기까지 했던 스스럼없는 행동을 유감없이 보이며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뽑는다는 속담이 뭔 말인지 몸소 실천해주던 결코 만만히 여길 수

없는 놈이었다.

 

여학생들의 고무줄놀이에 칼을 들고 다니며 끊어버리는 것은 기본이요,

치마를 훌러덩 올려놓고 당당히 ‘아이스케키’를 옵션으로 외치던 녀석이었다.

용서할 수 없는 놈이었다. 내게 있어서 놈은...

전학 온지 얼마 되지 않았어도 분명 나에 대해서 파다하게 돌고 있는 소문을

귀동냥을 접했을 텐데도 오히려 내게 태클까지 걸던 녀석을 더는 봐줄 수 없던 날.

전학 온지 얼마 되지 않기에 봐주려던 마음을 더는 눌러 참지 못하고서

내 자리를 비롯한 책상 위로 육상 허들선수라도 되는 양 먼지 묻은 발로 겅중겅중

뛰어 다니던 녀석을 향해서 빗자루를 휘둘러댔다.

 

그날 녀석은,

여자에게 맞은 것이 처음이었는지, 아니면 누군가에게 맞은 경험조차 없던

것인지, 당황을 넘어서 당혹까지 묻어 있던 얼굴이 곧 뜨악한 표정으로 바뀌는.

표정 3종 세트를 선보였다. 그런 반응 처음 접했기에 나도 살짝 뻘쭘 할 지경이었다.

끝내 피식 웃고 대수롭지 않게 나를 지나치고 말았던 녀석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았다. 물 말난 물고기처럼 활개를 치는 바람에 곧

우리들은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워낙 저런 녀석이야. 선생님도 어쩌지 못 하는걸...’ 하며 슬슬 재껴 놓기 시작할 쯤,

불가사의에 가까운 녀석의 행동모습을 두고 여학생들이 온갖 추측들을 논하기도

했다.

 

몇 달이 지나도록 점심시간만 되면 사라졌던 녀석이 수업이 임박해서야

교실로 헐떡이는 숨소리를 안고서 돌아오곤 했다. 짧은 10분의 휴식시간마다

부산하기 이를 때 없던 녀석이 종례하기가 무섭게 쏜살같이 교문을 가로질러

달려가기도 했다. 그리고 녀석은 전학 온 첫날 입고 왔던 야구점퍼와 청바지를

매일같이 입고 다녔다. 더운 날이면 벗어버린 점퍼 속에 입고 있던 티도 늘

똑같은 모양의 반팔 티였다.

금세 남학생들 사이에서 골목대장으로 등극했던 녀석과 소통하는 친구도

없는 듯 했다.

 

샤프하고 깔끔한 녀석을 두고 우리는 분명 꽤 잘사는 집에 외골수적인 성격으로

늘 집 밥을 고집하고 옷도 똑같은 옷을 여러 벌로 번갈아 입는 것이 분명할거라며

그래서 통제 불능한 버르장머리를 소유했을 거라는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그런 녀석의 실체를 알게 된 것이 그해 겨울방학의 개학을 며칠 앞뒀을 때였다.

 

방학동안 부모님이 계신 집에서 지내다가 개학을 이틀쯤 앞두고 학교가 코앞인

외할머니 댁에서 방학과제들을 정리하며 지낼 쯤 이었다. 할머니 곁에서

함께 생활하던 남동생 둘과 사촌남동생 하나는 죽이 잘 맞아서 밖으로 돌곤 했다.

먹고 자는 시간 외에 산으로, 들로, 학교 운동장으로 돌아다니던 녀석들을 식사

때마다 찾아다니기에 급급했던 난 녀석들의 발자취를 쫓으며 고래고래 동생들

이름을 불러대며 덕분에 마을을 휩쓸고 다녀야만 했다.

 

보통, 시간이 훌쩍 지난 식사를 해야 할 때마다 약이 바짝 올랐던 마음에 녀석들을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패주고픈 마음으로 쥐어박고 잔소리를 늘어놓기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밥이 보약이라고 부르짖는 할머니께 녀석들을 하루정도 꼬박

굶기자는 제의를 굳건히 드리기도 했지만... 변변히 난 우라질 년이 되고 말았다.

 

그날도 그랬다. 외 손주를 위하느니 방아괭이를 위하랬다는 옛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사시면서도 방아괭이보다 못한 딸들의 자식들에게서 정을 떼버리지 못하고

물마를 새 없는 쑤세미처럼 거친 손을 하고서 점심으로 칼국수를 먹자며 밀가루

반죽에 진한 애무를 행하던 할머니께서 밖으로 나간 뒤 역시나 함흥차사가 돼버린

당부를 져버린 녀석들을 찾아오라는 하명을 내게 내리셨을 때 바람이 매서운 밖으로

두꺼운 점퍼를 껴입고 콧바람 씩씩거리며 밖으로 나선 길이었다.

 

버스가 다니는 정류장에서 사방이 훤하게 뻥 뚫린 논길을 가로질러 만든

경운기가 다닐 수 있는 통로를 따라서 300m쯤 들어오면 소나무가 우거진

대덕산을 끼고 있던 아담한 마을이 나타났다. 향토적인 건물들의 맨 끝으로

밤 12시가 되면 귀신이 출몰한다는 흉흉한 소문이 무성한 묘지를 깎아

만들었다는 우리가 다니는 초등학교가 자리 잡고 있었다.

 

학교 정문과 20m도 채 떨어지지 않던 외할머니 댁을 비롯해서 10채도 안 되는

비슷한 모양새의 기와를 올린 가구들이 옹기종기 텃밭을 끼고 모여 있었다.

 

그중 학교와 가장 멀리 떨어진 한 건물만이 외톨이처럼 특이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회색 페인트칠이 벗겨진 을씨년스런 건물 주변에는 적막함이 트랜드인 것마냥

흔하게 널려있던 개나리나무 한그루조차 없던 곳이었다. 음습한 그곳을 지날 때면

한 낯에도 등골이 오싹할 정도였다.

 

형무소처럼 높았던 담에는 대문이 없었다. 또, 담의 입구와 건물의 입구가

정반대인 희한한 구조를 하고 있었다. 그 건물은 할머니 댁과 100m쯤 떨어져

있었다. 일제시대 땐 일본순사들의 관사로 쓰이기도 했다던 낡은 건물을 꽤

오래전에 누군가 매입했고 수리해서 세를 놓고 있다는 소문까지 무성했던 건물은

요새와도 같아보였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마을사람들과 소통조차하지 않는 듯

할머니와 이웃인 분들이 나누던 얘기를 귀동냥해서 얻어낸 정보론 도통 모를

건물의 사람들이라고 했다.

 

마을 사람들과 철저하게 단절됐던 그 집을 끼고 돌아가야만 동생들이 썰매를

타고 놀던 논을 찾아 갈 수 있었다. 동생들 덕에 그곳을 스쳐 지나갈 때마다

공상의 나래를 자주 펼쳤던 나는 그곳에 삐라를 뿌려대던 간첩이 살거나 어린아이들을

잡아서 싱싱한 심장을 꺼내먹어야만 완치를 할 수 있다던 문둥병 환자가 숨어살지도

모를 일이라는 상상으로 진저리를 쳐대기도 했다.

 

볼 때마다 짖어대는 사나운 이웃집의 누런 땡칠이에게 작대기를 과감하게

휘두르고 지나쳤던 내 눈으로 머지않아 곡예라도 하듯 요새 같은 건물을 감싸고

있던 높다란 담장 위로 다리를 벌리고 걸터앉아있는 사람의 뒷모습이 들어왔다.

그곳에서 생명체가 목격된다는 것이 희한했던 첫 순간이었다. 또 그 높다란 곳에

사람이 어떻게 올라갔을까 역시나 불가사의한 곳이라는 확신과 어른이 아닐

그 사람이 떨어지면 어쩌나 걱정됐던 마음을 안고 담 밑으로 지나갈 쯤,

목을 빼고 올려다 본 나와 그런 나를 내려다보는 눈이 마주 친 순간 다시

놀라고 말았던 나...

 

그 사람이 다름 아닌 전학 왔던 괴짜 녀석이라는 것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지만

시치미 떼고서 지나치고 말았다. 녀석과 말을 섞어봐야 영양가가 없을 것이

불 보듯 빤했기에 ‘야! 네가 왜 거기 있냐?’ 하고 묻고 싶은 말을 꾹꾹 참고서.

 

마지막 코스였던 논바닥 빙판 위에서도 동생들의 모습을 찾지 못하고

바짝 약이 오른 상태로 왔던 길을 되돌아 갈 때까지도 녀석은 그곳에

있었다. 역시나 무시하고 지나치려는 내게 녀석이 대뜸 말을 던졌다.

 

“야! 너 저기 초록대문에 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