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 먹일 점심 준비로 분주할 때였다.
아영이가 익숙한 자세로 슬라이드를 밀어올린 핸드폰을
내 귓가로 대주었다.
“***씨 되시나요? ”
연륜이 느껴지는 중저음의 남자목소리가 핸드폰을 통해 들려왔다.
“네, 그런데요?”
요즘은 광고성 전화도 지능적인 경우가 많았기에 그중 하나쯤으로
여기며 덤덤하니 대꾸했다. 여전히 나를 위해 아영이는 귓가로 핸드폰을
대주는 수고를 마다치 않는 자세로 있었다.
“교육청 중등부 장학사 ***입니다.”
“!...네...”
국민신문고를 통해서 교육부장관에게 글을 보냈던 것이 접수됐다는
메일수신이 있었기에 조만간에 연락이 올 거라 짐작하고 있었다.
그날이 오늘이었다.
아빈이가 가져왔던 <방과 후 학교수업>에 대한 아쉬움을 담아 보냈던
내 글이 높은 양반들에게 얼마나 영향을 미치려나, 계란으로 바위치기의
무모한 짓에 지나지 않을 거라고 스스로도 여겼던 부분이 없진 않았지만
가만있기엔 억울해서 지렁이도 꿈틀한다는 심정으로 보냈던 글이었다.
‘시정 하겠습니다’라는 식의 형식적인 뻔한 누군가의 말이라도 들어줄 의향이
충분히 있었다. 그런 마음이었기에 장학사의 연락이 갑작스럽다거나 당황스럽지
않았다.
“국민신문고에 올리신 글을 보고 연락드렸습니다.”
“네, 그렇군요... 제게 해주실 말씀이 있나요?”
제법 높은 자리에 앉아서 아랫사람들을 거느리며
이리 왈 저리 왈을 통보하며 지냈을지도 모를 양반이 영향력 없는, 그것도
한낮 학부형에 지나지 않으면서도 도발에 가깝게 짧지만 당당하기만 했던
내 말에 당황했을지도 모른다. 아님 말고...
어쨌든 그는 내 말에 긴장한 듯 연실 헛기침을 해댔다.
사실 나와의 대화로 그가 조금이라도 긴장하길 바랬다. 그러길 바랬다.
힘겨운 가정경제로 헐떡이는 서민이지만, 그래서 부담되는 사교육비로
고통 받는 찌질한 엄마일 뿐이지만 납세의 의무를 저버리지 않고
살았던 국민의 한사람으로써 주눅들 필요 없이 당당하고만 싶었다.
“...네...으흠!!!... 글을 읽어보고 공감한 부분을...으흠!!!...느꼈고
그래서 시정이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말씀하신 부분들을 조만간에
바로 잡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 시정이 언제쯤 현실 가능해 질지, 계획을 세우신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행하실 것인지 듣고 싶네요.“
나는 그제서야 아영이 손에서 핸드폰을 받아들고 아빈이 방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네... 으흠!!!... 음... 3월 달쯤이면 학교에서 공문을 받아보실 수
있을 겁니다...“
“생각보다 빠른 시일 안에 시정이 된다니 다행이네요. <방과 후
학교 학습>에 대한 아쉬움을 건의하는 사람이 저 말고도 있던가요?“
나처럼 무식을 용감 삼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는지 알고 싶어서 물었을 뿐
의미는 없었다.
“...비슷한 상황은 아니지만...으흠!!!...건의 하시는 분들이 있기도 합니다만
... 보통은 있어도 행동으로 옮기시는 분들 얼마 안됩니다. 주소를
보니 **구 쪽이라고 나와 있네요.“
귀에 거슬리는 장학사의 헛기침이 일정한 간격으로 흘러나왔다.
말 습관인지 아니면 긴장하면 일어나는 그분의 신체 반응인지, 그도 아니라면
장학사라는 직책도 만만한 자리가 아니어서 줄담배로 쓰린 속을 달래가며
살아가야하는 직업병의 후유증으로 폐로 가득 채워진 가래를 빼내야 하는
수고스런 증상인지... 말 몇 마디 속에 불편한 효과음(?)을 들으며 난 별것을
짐작하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들었던 그분의 대답으로 짐작컨대 난 보통의 엄마를 뛰어 넘어
섰고 그에게 결코 달갑지 않은 사람으로 치부 됐을 것이다.
보냈던 글의 내용 끝자락에 추신으로 분명 나의 신상에 대해서는 밝히면서
내 아이가 다니는 학교를 밝히지 않는 것 또한 자식을 걱정하는 엄마의
조심스런 마음으로 헤아려주길 바란다고 미리 전한바 있었다.
그런 나의 마음에도 불구하고 장학사가 <**구>를 운운하며 추리하듯
근처의 학교들을 나열했다. 그 말이 내겐 ‘너 따위가 감히 겁 없이 그런 무모한
짓을 했냐?‘하는 식의 경고처럼 느껴졌다. 어쩜 약자의 자격지심일지도 모르겠지만.
“제가 올린 글이 이 지역, 거기서도 제 아이가 다니는 학교와 저희 가족에게만
해당되는 사연일거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지금처럼 어려운 시국에
자녀들의 교육비에 대한 부담감으로 헐떡이는 부모들이 많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실 거라고 믿고 싶습어요.
공교육이 아이들의 학업성적에 도움이 된다고 여긴다면 굳이 학원까지 필요
할까요? 부모들 대부분이 비싼 학원보다 그보다 저렴한 학교수업 받길
원하겠지요. 그리고 제 아이가 다니는 학교를 굳이 알고 싶으시다면 말씀
드리겠지만 장학사님께서 제 아이에게 불이익 갈 일이 없다는 약속을 미리
주셨으면 하네요..“
“...으흠!!!...네, 정확한 생각이십니다.... 저희들이 이 사업을 시행하며
개선점을 찾으려고 큰 예산을 들여서 학교마다 방침을 내려 보내긴 하지만
잘 이뤄지는 곳이 있는 반면 아쉽게도 그렇지 않은 곳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떠한 경우에도 아이에게 불이익이 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중학교입니다. 저는 분명히 장학사님께서 하신 말씀으로 앞으로 개선점이
보여 질 거라고 믿겠습니다. 내신 성적에 반영되는 학과가 몇 가진데 달랑
받을 수 있는 수업이 2과목뿐이라면 말이 안 돼지요. 기본적으로 국어,
수학, 사회, 과학, 영어 정도는 받을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짜여 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요, 기본이 되는 과목이 패키지형식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느끼기로 **중학교의 교장선생님께서도 나름대로 위에서 지시하는
공문대로 열심히 행하시려고 노력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해요. 가정으로
보내는 특별한 공문에 대한 것들을 미리 학부모 핸드폰으로 연락주시는
배려만 보더라도 알겠어요. 하지만 세심함이 아쉬워요.“
내 말에 이런 저런 얘기가 나오더니 장학사하시는 말씀이 굳이 저소득층이
아니더라도 사교육비 경감을 위해 1년에 34만 원가량 지원 해주는 <자유
수강권>이 학교에서 실행되고 있는데 그 사실을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
학교에서 받는 <방과 후 학교 수강비>에 적용 받을 수 있다면서 선생님과
상담만으로도 자격이 주워 진다고, 그런 공문을 받아 본 적이 없느냐고도
물었다. 나는 그런 것이 있는지 몰랐다고 했다.
어쩜 그런 공문을 학교 측에서는 보냈지만 우리아이가 내놓지 않은 건지도
모른다고, 조만간 졸지에 발등 위로 불이 떨어질지도 모를 아들의 교장을
두둔하듯 말을 덧붙여야 했고 기차에 꼬리 달듯 말을 잇 길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도 아이의 사기를 위해서 신청할 부모가 몇이나 되겠냐며
나부터도 선뜻 나서지 못할 조심스런 부분이라고도 했다.
졸지에 아들의 학교를 밝히며 칼날은 내가, 칼자루는 장학사가
쥔 상황이었다. 어쩜 이 또한 나 혼자만의 신경전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자식 일에 약자일 수밖에 없는 엄마는 그가 윗자리에 앉아서
칼날을 휘두르게 될지도 모를 상황까지 헤아리며 얼마나 먹혀들지 모를
협박성 멘트를 승부수처럼 던졌다.
“저는 어느 사이트에서 글을 올리는 사람입니다. 제가 신문고에 올렸던
글 그대로 그곳에도 한날 올리기도 했습니다. 주부들이 모이는 공간이다 보니
저와 공감대를 이루는 분들도 제법 있었습니다. 오늘 제가 장학사님과 나눴던
내용도 그곳에 올릴 생각입니다. <자유수강권>에 대한 내용과 3월쯤 개선된다는
<방과 후 학교 수업>에 대한 희망 담긴 글도 올릴 생각입니다.“
“...으흠!!!... 네! 그렇군요. 좋은 생각이십니다. 3월이 아니고
2월 말쯤이면 계획이 짜여 져서 아이들이 개학하는 날부터......중간 생략...
저희 교육청에서...중간생략....”
약간은 두서가 상실된 듯한 그분의 말이 몹시 길게 나열되었다.
잠깐사이 3월 달에서 2월로 단축된 시일과 더욱 성의를 담은 말에
교육청 사이트 자료실 코너까지 찾아다니며 알려주는 세심함까지 짙게
녹아내려 있었다.
잠깐 동안 쉽게 수화기를 내려놓지 못하고 헤매는 장학사의 노고가 내게
코메디로 느껴지기도 했다.
사교육비 절감과 아이들의 학업성취도도 중요하지만 학교 선생님들과
아이들의 유대감을 위해서라도 공교육 수업이 개선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보여 지려는 것보다 실속을 중요시 여기는 교육이 됐으면 좋겠다고도 했다.
그리고 혹시 모를 불상사(?)를 위해 장학사의 이름과 연락처를 받아 적어 두었다.
능력 없는 엄마로 살아가다보니 구차하게 별 것까지 신경 쓰며 살아가는 내가
씁쓸하기도 했다.
장학사의 약속이 얼마나 이행될지 모르겠다. 저렴한 가격으로 학과성적을
올릴 수 있는 교육이 현실로 가능해지는 날이 오긴 하려는지, 그래서 우리
부모들의 짐이 조금이나마 줄어들 수 있게 되려는지 확신할 수도 없다.
없는 여자의 발악쯤으로 치부될지도 모를 일이다. 이 나라에서 없이 살면서 느끼는
억울함으로 하소연할 것들이 싸여가고 있지만 우선 내게 떨어진 발등의 불씨가
너무 뜨거워서 같은 아픔을 느끼고 살아가는 부모들을 대변한다는 심정으로 떨었던
용기가 용감함으로 결실을 맺게 될지 아니면 미련으로 끝이 날지도 모를 일이다.
하긴, 살아가다보니 점점 누군가의 인정도 필요로 하지 않는 나를 느낄 때가 많아
졌다. 홀로 아리랑 할 때가 많아졌다.
그런 내가 간이 배 밖으로 나왔는지, 부었는지도 모를 일이고 그마저도 개의치
않는다.
말 끝자락에 다다라서야 내가 너무 장학사에게 고삐만 잡아당긴 듯 하여
쉽게 수화기를 내려놓지 못하는 장학사에게 전화를 끊기 전에 한결 누그러진
어투로 몇 마디를 남겼다.
“글을 올려놓고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연락을 주신다고 하더라도
형식적인 말 몇 마디뿐일 거라고 짐작했는데 제 의견에 대해 깊이 생각해주시고
성심을 다해서 답변을 주신 장학사님의 말씀에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고 감사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생판 모르는 그분과 나눴던 제법 긴 통화였다.
40분을 넘긴 통화로 인해 도서관에서 돌아 온 아빈이가 무슨 일이 있나
걱정을 했다는 말까지 들어야 했다.
장문의 글을 쓰는 손만큼이나 수다스런 내 입이 오늘 했던 일이 헛된 수고가
되지 않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