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창밖으로 보이는 세상이 온통 희였다.
숲을 이룬 나무들의 머리로 잔뜩 쌓인 눈의 무게가 가지들을
늘어트렸고 그 모습이 주눅 들어 보였다.
꼭 고뇌에 지쳐 늘어진 내 모습을 보는 듯, 그래서 안쓰러웠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가 만약 행복에 겨워 사는 사람이었다면
눈으로 뒤덮은 울창한 소나무 숲을 그런 슬픈 눈으로 해석했을까, 하고...
어머님이 작년 10월 말쯤 서울에 다녀가셔서 뵙기는 했지만
시어머님이 계신 해남을 내 발로 찾게 된 것이 햇수로 3년만인 듯하다.
멀리 떨어진 거리 탓만은 아닌데 번번이 상황들이 따라주지 않아서
결코 찾기 쉽지 않은 시댁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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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수같은 남편이지만 사는 동안 내 의무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도
때마다 찾으려던 곳이었다. 이번 구정만큼은 한 달 전부터 벼르고 벼르던
나와 아이들의 마음이었다.
무슨 행사건 디데이와 여유 있는 날에 남편은 늘 갈 것을 호언장담
했었다. 그리고 그때가 가까워지면 ‘잘 모르겠다.’라는 애매모호한 말로
바꾸었고 때가 된 날이면 다음 날을 기약했었다.
이번 구정 시댁방문에도 남편은 쉽게 갈 것을 약속 했었다.
그것을 미리부터 짐작했던 나였다. 내 몸 편한 친정을 찾는 것도 아니요,
가는 날부터 눕는 순간까지 손에 물마를 세 없이 일해야 하는 시댁을
찾는 일인데도 내가 몸이 달아서 시댁을 가기 위한 잔머리를 굴려야만 했다.
어머님 연세 올해 79세...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연로하신 분이다. 그런 분이 아직도 두 아들과 손녀딸을
위해서 집 안 일에서 손을 떼지 못하고 사시는 것이 안됐다.
나와 무관하지 않은 미래의 내 모습일 것만 같아서, 또 내 엄마의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생각이 나서... 나는 안쓰럽다.
열흘 전부터 어머님께 챙겨드릴 것들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늘 턱없이 부족한 그놈의 돈에 대한 미련도 잠시 접고 친정아버지가 주신 돈이
벌써 축나서 겨우 두 달 생활비로 버틸 것 밖에 남지 않았지만, 그래서 떠오르는
근심거리들이 많았지만 그것들도 잠시 접어두고자 했다.
과연 나라면 어땠을까, 감히 엄두도 못 냈을 6남 1녀, 7남매를 홀로 키우신
고생으로 몸이 굽은 연로하신 불쌍한 분만 생각하고자 했다.
어느 아들며느리에게 대접받지 못하고 사시는 어머님의 불효막심한 며느리 중에
나도 하나일 뿐이라는 것만 반성하고자 했다.
빳빳한 만원짜리 지폐 20장을 봉투에 담아 어머님께 드릴 것을 미리 챙겨
가방 한쪽에 담아두었다. 그리고 대형마트를 찾아서 어머님이 좋아하셨던
과일통조림들과 여러 사탕들을 챙겨놓고 좀은 과하게 남편 곁에서 수선을
떨었다. 들어간 돈들이 아까워서라도 어떻게든 찾아가야 할 판이라고
팔푼이처럼 주절거렸다. 그렇게 고심하며 겨우 남편이 고향방문을
다짐받을 수 있었다. 치사하고 더러워도 숙제같은 마음을 해결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 이 마음마저도 더럽지만...
우리들의 출발계획은 설 연휴 첫날인 일요일 새벽 12시를 넘겨서였다.
땅 끝 마을과 가까운 해남의 장거리, 정체까지 된다면 힘겨울 거라며
남편이 그렇게 하자고 했다. 그때까지 우리가 걱정했던 것은 정체뿐이었다.
하지만... 늘 그랬듯, 꼭 그래야만 하는 것 마냥... 장애물이 앞을
막고 나섰다. 겨울 가뭄을 운운하며 건조했던 날씨가 때맞춰 폭설이
되어 내리다니...
그래도 남편에게 출발할 것을 권했다. TV를 통해서 본 교통상황이 점점
악화가 되더니 고속도로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멈춰선 차들로 거대한
주차장으로 변해있는 영상을 내 눈으로 보고도 출발을 고집했었다.
어머님께 저녁나절 통화할 때 분명 내려가겠다고 말씀을 드린 터였다.
그래서 더욱 더...
어쨌든 그런 상황에 출발했던 사람들이 즐비하게 많았으니까, 그들이
내게 효자효부들로 보였으니까... 그래서 우리도 그런 사람들 틈에
있자고 했었다.
일생이 불쌍한 어머님께 잠시라도 휴식을 드리고
싶었던 마음이 수그러들기 전에... 가고자 했었다.
3년 전쯤 전라도 광주에 사시는 큰 시숙님이 어머님은 모셔갈 생각도
않고 무슨 마음인지 제사를 모셔갔다.
그리곤 어인일인지 우리들에게 제사에는 안 내려와도 되니
어머님이 계신 해남으로 내려가라는 애매한 말씀을 서슴없이 했었다.
그렇잖아도 화합하기 어려운 형제들이 더욱 뿔뿔이 흩어지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제사를 광주에서 지내고부터 어머님은 남편의 제사상을 지켜보지 못하신 듯
했다.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이번 설만큼은 어머님도 광주에서 올라가서
지내실 마음이었던 것 같다.
설 명절, 조상을 모시는 것도 중요하지만 난 살아계신 어머님을 뵙고
싶은 마음이었기에 큰 형님께 전화를 드려서 어머님이 설 때 어디에
계실 계획인지를 물었었다. 내 물음에 형님은 잘 모르겠다며 직접
어머니랑 통화를 하라고 했었다.
(심장판막증을 앓고 계셔서 약을 드시고 계신 어머님이 갑자기 약을 끊겠다고
하셔서 걱정이라는 말을 내게 전했던 근심가득 했던 형님이 환갑이 가까워지니
철이(?) 들었나보다고 서서히 나도 마음을 열고 대하던 차였다.
그동안의 섭섭했던 마음 한쪽으로 치워두려고 했건만...
어머님과 나눈 말 몇마디에 사기 당한 기분이 되었고 참았던 마음들이 화산처럼
솟구치며 따져 묻고 싶은 마음을... 지금, 억누르고 있기 쉽지 않다.)
형님과 통화하고 난 다음 날 출발하기 전에 어머님께 전화를 드렸다.
그런데 어머님은 또 이상한 말씀을 하셨다. 이번 설은 광주로 올라가실
의향이었단다. 형님에게도 그렇게 말씀하셨었다고 했단다. 그런데 광주에서 연락
오길 5째인 우리가 내려간다고 하니 올라오시지 말고 그곳에 계시라고 했다고...
어머님 말씀 여운이 우리 때문에 큰 집을 찾지 못하게 된 것이 아쉬운 듯 했다.
큰형님을 이해하려고 했었다. 어쨌든 제일 큰 어른으로 어머님에 관해서 신경을
써도 더 쓰실 테니,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나로서는 입을 닫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부정하고픈 부분이 생겨도 수긍하려고 애를 썼다.
신혼 초, 망나니 격이던 나는 시댁 형님들의 어긋난 행동에 어김없이 입바른
소리를 해댔고 그런 사실을 고스란히 어머님께 고자질을 해대는 바람에 졸지에
어머님과 대면대면 했던 적도 있었다.
살다보니 태생을 어쩔 수 없다는 것과 남의 생각이 내 생각과 같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마당에 차라리 잠잠한 평화만이 어머님께 내가 해드릴 수 있는
도리라며 나름 불끈하던 성질을 서서히 내면 안에 고이 접어 두고 지낼 때가
많아 졌다. 남편이 미우면 시댁식구들도 밉다고 어느 인간 상대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내게 어머님은 다르다. 그분의 괴팍한 성질과 거친 입이 나 역시
때론 거부감이 들기도 하지만 그 분이 여자로써 살아 온 삶과 앞으로 기약없는,
결코 길게 남지 않았을 명이 내가 무심할 수 없게 했다.
외할머니 손에 자라며 봤던 할머니의 눈물과 내 엄마가 자식들을 출가
시키고 겪는 마음들을 지켜보며 나를 빗대게 되었고 그렇게 차차
인생무상이란 무엇인지 조금 알게 된 마음이었다.
품안에 자식들이 커서 제 가정을 가꾸며 살 때 어린 날 세상에 전부처럼 부모를 여겼던
자식들의 마음은 어디에도 없음을 벌써 알아버린 마음이었다.
이 나이에 죽는다고 해도 한이 많을 나... 30대 초반에 뱀에 물려 죽은 남편 몫까지
대신해서 홀로 7남매를 키우며 살아오셨을 어머님의 삶이 오죽하셨을까...
부쩍 그런 생각이 든다.
삶 자체가 박복한 어머님은 현재 사연 많은 오십이 훌쩍 넘은 둘째 아들과
오십이 멀지 않은 4째 아들, 그 아들의 큰 딸인 고2가 되는 손녀딸과 함께 사신다.
둘째 시숙님은 결혼식만 2번을 올렸고 형식 없이 함께 산 여자들은 몇 명이
더 있었지만 모두 하나같이 1년을 같이 살지 못했다. 그분 역시 술이 과했다.
그리고 성질도 지랄 맞아서 살림을 때려 부수는 일은 기본이요, 안하무인이었다.
백수에 가까운 지금까지 술로 사신다고 했다.
넷째 시숙님 역시 애매한 삶을 살고 계신다. 첫째 부인이 둘째 아이를 조산으로
낳다가 잘못되는 바람에 실명에 가까운 시력과 총명함을 잃은 뇌를 소유하게
됐을 때, 서울서 낙향하여 어머님과 함께 살게 되었다. 그리고 몇 해 뒤에
어머님은 4째 며느리가 세상 뜨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내게 4째 형님이셨던 그분은 뵐 때마다 골방에서 홀로 외톨이로 있었다.
누가 씻어줄 사람이 없어서 머리는 기름떡이 졌었고 때가 꼬질꼬질했었다.
그 형님을 챙겨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꾸부정한 허리와 굽은 다리로 끙끙
앓으면서도 밭으로 다니시는 어머님은 당신의 박복한 팔자를 거한 입으로
서슴없이 털어놓고 계셨고 바깥일로 바쁜 남편은 늦은 밤, 술로 들어왔다가
아침에 나가곤 했다. 형님은 어린 딸과 함께 천덕꾸러기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처음 몇 해는 조산으로 하혈을 할 때 뇌에 물이 찼던 후유증 때문에 정신이
온전치 못한 형님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는 듯 했다.
나는 시댁에 내려가 뵐 때마다 그 분과 함께 어울리려고 했다. 조카와 형님의
몸을 씻어 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 잠깐이 그 분이 홀로 겪었을 마음의 상처들을
모두 보듬어 주기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해가 거듭될수록 내가 만났던
형님의 총기가 회복되는 것 같았다. 내 말에 아무도 신경 쓴 사람이 없었지만...
그분이 내게 시숙님이 자신을 멀리하고 바람을 피는 것 같다고 말했을 때
왜 그런 사실을 직접 물어보지 못했냐고 물었더니 그저 입가에 엷은 미소 띄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 했었다.
다른 이들도 눈치 채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형님의
정신은 완전한 정상을 찾고 있었다. 시력만을 찾지 못하고 있을 뿐...
4째 형님이 어머님과 함께 산지 7년쯤 됐을까, 조용히 입 닫고 계셨던, 흐릿하니 사물을
짐작할 시력을 갖은 분이 읍내에 나가서 제초제를 사다가 빨대를 꼽아서
먹고 병원에 입원한지 3일만에 죽었다는 사실을 난 장례식에 가서야 알게 되었다.
갑작스레 왜 돌아가신 거냐고 장례식장을 찾은 내가 어른들에게 물었을 때
속 시원하게 말해준 사람이 없었다.
죽은 형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사람도 없는 듯 했다. 내가 보기엔.
형사들이 오고가는 장례식장의 분위기는 험상궂었다. 침울한 분위기에
형님의 친정식구들과 못지않게 인상을 구긴 시댁 식구들은 간간히 입에
담지 못한 망 말들을 했다. 당시 나도 죽지 못해서 사는 나날이었다.
늘 죽음을 꿈꾸던 삶이었다. 형님의 자살은 내게 여러 가지로 충격이었다.
죽으면 끝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슬퍼하고 이해하는 사람보다 이를 물며
분개하는 사람들이 더 많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분명 그분이 죽음의
문턱을 넘기 전 생각하지 못했던 상황이었을 것이다.
초등학교 3학년이던 형님의 딸은 제 엄마가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난 것도
모르고 천연덕스런 표정으로 장례식장 안을 휩쓸고 다니며 놀았고 아무도
그 아이의 끼니를 챙기는 사람도 없었다.
어쨌든 그 분의 그 죽음으로 난 ‘자살’을 쉽게 여길 수도 없게 되었다.
그런 심란한 심정으로 있는 내 곁에서 큰 형님과 셋째 형님도
집안 망신을 시켰다며 4째 형님 헐뜯기를 돕길래 발끈 했던 내가
참지 못하고 한마디를 하고 말았었다.
“같은 여자고 며느리면서 매정하게 말씀하실 수 있으세요? 앞도 잘 못 보는
사람이 택시를 불러서 약을 사다 먹었을 때 심정 좀 헤아려보신다면 그런 말씀들
못하시지요. 만약 우리들이 하루아침에 눈이 보이지 않고 완전한 바보도 아닌
상태에서 남들에게 무시를 당하고 살았다면 어땠을까요?!“
그 말에 더 이상 내 곁에서 그들은 입을 열지 못했다. 하지만 뒤에서 나를
무차별적으로 씹었을 인간들이다. )
4째 시숙님은 형님이 세상을 떠난 지 1년도 되지 않아서 선을 봤던, 초등 고학년의
아들이 있는 두 살 연상여와 재결합을 했다. 그 둘 사이에서 태어난 딸을
둔 상태지만 그들은 지금까지 함께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한 집에서
지내지도 않고 있다. 때마다 4째 시숙님은 내가 아직 형님이라고 부르는
것도 어색한 몸을 섞은 여자를 만나기 위해서 광주까지 출장(?)을 다니며
어머님께서 지은 밥을 먹고 해주신 빨래를 입고 다닌다. 그걸 따지는
사람들도 없는 듯, 너무도 개별적인 혈육들을 나조차 방관하고 볼 수 밖에 없다.
여러 가지로 안타까운 현실들 속에서 형님들은 스무살이 넘은 자식들을
두고도 어머님께 전화해서 신랑 때문에 못살겠다고 하소연을 했다는
말을 내게 전한 적이 종종 있다. 때론 그들의 행실이 부러울 때도 있다. 나로썬...
나도 남편에 대한 불만과 하소연을 시댁 누군가에게 떠들고 싶을 때가
있지만 실행에 옮긴 적이 없다.
왜?... 그만큼 마음으로 가깝게 여긴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말이 또 샛길로 빠지고 말았다. 모처럼 들른 시댁을 가기 전부터 다녀 올 때까지
겪은 일들이 마음을 묵직하게 누르고 있다. 또 내 마음에서 풀어내버려야 할 것들이
생겨버렸다. 주변에 모든 것들이 내가 글을 쓰길 바라는지 소재들을 줄줄이
만들어주는 듯하다...)
어쨌든 우리는 계획 된 날에 출발하지 못하고 말았다. 어머님이 계신 해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