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8월 정오 무렵이었다. 무더위에 장작불 온도까지 더해진 마당 한 귀퉁이에서 아이는 자신이 알고 있던 모든 노래와 율동을 펼쳐보였다. 이제 그만 하라는 우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흐르는 땀을 연신 조막만한 손으로 닦으며 한곡이 끝나면 잠시 쉬었다가 다시 새로운 노래를 불렀다. 나중엔 이미 불렀던 노래와 율동이 되풀이 됐지만.
나와 어머니, 큰올케와 작은올케가 관객의 전부였음에도 아이는 처절하리만큼 최선을 다했다. 가끔 솥에서 막 쪄낸 송편과 시루떡 한쪽을 떼어주면 아이는 손보다 먼저 반짝이는 눈빛으로 떡을 반겼다.
해가 기울고 마당가득 어둠이 내릴 때쯤 친척들이 도착하며 집안이 갑자기 소란스럽고 바빠졌다. 우리 집 마루에선 제상에 올릴 음식과 저녁상에 올릴 음식들이 다른 그릇에 나뉘어 담아지기 시작했다.
“아! 나도 배고프다!”
나는 깜짝 놀라 소리 나는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어둠속에서 웅크리고 앉아 있는 아이의 윤곽이 흐릿하게 잡혔다. 함께 시선을 돌렸던 어머니는 “아이고 저 아이 생각을 못 허였구나게(못했구나)” 하시며 내게 비닐봉지를 가져 오라일렀다.
떡과 함께 튀김과 동태전 등을 골고루 담은 비닐봉지를 건네받은 아이는 나는 듯 아랫집 문간방으로 뛰어갔다.
“아빠! 이것 봐 떡 가져왔어!” 라는 아이의 들뜬 목소리가 우리 집 마루까지 울려왔다. 그 목소리엔 공짜가 아닌, 자신의 노력으로 먹을 것을 가져왔다는 자랑스러움이 실려 있는듯했다.
그제 서야 나는 뙤약볕이 내리쬐는 정오부터 어둠이 내려앉은 시각까지 아이가 왜 그렇게 혼신을 다해 노래와 율동을 해보였는지 이해할 수가 있었다.
사흘내리 온몸의 피를 변기 속으로 흘려보낸 지난해 9월 말.
어떻게 병원 문을 열고 들어갔는지 조차모르고 수술대에서 깼을 때였다. 온통 피로 얼룩진 아랫도리를 내려다보며 부끄러움도 사치라는 생각에 눈물을 흘렸다. 그 이면엔 서른둘에 낳아 키우기 시작한 세 딸이 못내 가슴속 혹이라는 스산한 감정이 깔려 있었다.
일주일 넘게 조혈제와 철분제 링거를 맞고 퇴원한 이튿날아침, 유난히도 까맣고 결이 차분한 셋째의 머리를 빗겨주다가 문득 그 아이를 기억해 냈다.
아마도 오랜 시간 머리를 감지 않아 작고 동그란 두상(頭相)이 도두보일 정도로 착 가라앉았던 그 아이의 머릿결이 셋째의 머리와 닮았기 때문이리라.
당시 친정집은 서귀포시내 시장터중심부에 위치해 있었다. 유난히 긴 골목 때문에 우리 집과 앞집은 대문을 함께 사용했었다. 우리 앞집에 그 아이가 이사 온 시점은 내가 모 지방방송국 라디오프로에서 리포터를 하던 스물여덟 되던 해였다.
낮에는 주로 산남지역 문화계소식이라든가 미담소식을 취재하러 다녔는데, 그날도 취재를 하러다니다 집으로 돌아와 보니 골목입구에 웬 타이탄 트럭이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모피코트 차림의 웬 30대 여성이 자질구레한 살림을 골목 안으로 나르고 있었다. 굽 높은 구두를 신고서.
차림새로 보아 우리 집 골목 살이 하곤 거리가 멀어보였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이라 생각하며 집안으로 들어왔다. 헌데 잠시 뒤 부엌에서 “연탄 다섯 장만 빌려갔다가 갚으쿠다.(갚겠습니다.)”라는 소리가 들렸다. 부엌문을 열어보니 여인은 벌써 연탄을 집게로 들어내고 있었다. 마치 예전부터 살갑게 지내오던 이웃처럼.
오토바이 사고로 반신불수가 된 남자와 여섯 살 된 여자아이기 이사 왔다는 말을 앞집 아주머니를 통해 들은 것은 이튿날이었다. 하지만 내가 그 남자와 아이를 본 것은 이사 온지 사흘째 되는 저녁 무렵이었다. 남자는 오른손으로 목발을 짚고 발을 힘겹게 끌면서 산책을 다녀오는 중이었다.
사고 후 거의 외출을 못해서인지 허여멀겋게 살찐 아빠와는 달리 버짐이 덮이고 마른데다 외소하기까지 한 그 아이는 사뭇 다른 인상을 풍겼다.
규칙적이진 않았지만 아이엄마는 시내 모 다방에서 일하며 일주일에 한번정도 남편에게 들러 약간의 생활비를 건네주고 가는 것 같았다.
그렇게 봄이 가고 여름이 왔다. 아이 엄마는 그간 수차례골목을 오가며 나와 마주쳤지만 꾸어간 연탄에 대해선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오히려 나를 빤히 쳐다보며 스치는 통에 내 쪽에서 머쓱해지기조차 했다. 어쩌면 그런 능청스러움으로 벌써 여러 군데 이사 다니며 난방비를 절약한 것도 같았다.
아이는 여름부터 제법동네아이들을 골목 안으로 데리고 들어와 놀기 시작했다. 그 즈음 골목입구에 있던 우리 집 수돗가가 엉망이 되어갔다.
아이들은 커다란 물통에다 세제를 풀어놓고 거품장난을 치기도하고, 화단의 꽃잎들을 뜯어다 소꿉놀이도 했다. 나는 그때마다 아이를 꾸짖어보았지만 하루만 지나면 다시 예의 행동이 반복되었다. 장애아빠의 시중을 들면서 일주일에 한번 찾아오는 엄마를 손꼽아 기다리던 그 아이에게 달리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이라곤 없었을 것이다. 내게 아무리 욕을 들어도 아이는 개구쟁이 친구들과 그렇게 놀다가 욕 한번 듣고자 마음먹은 듯했다.
8년 전 시숙님의 부채(負債)를 나와 한마디 상의 없이 짊어지고 온 남편으로 인해 우리아이들의 힘든 나날도 시작되었다. 궁여지책으로 피부관리사 교육을 받고 곧바로 일을 하러 다녔다. 아홉 살 큰딸에게 학교가 파하면 곧장 집으로 돌아와 미술학원에서 돌아오는 세 살과 다섯 살의 두 동생을 돌보게 했다.집을 나섰다가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와 대문 앞에서 이층셋집을 올려다보면, 형광등빛을 지고선 세 딸들의 머리가 창문에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집안 여기저기엔 장난감과 뒤엉켜있는 철지난 옷가지들이 매일 딸아이들과 함께 나를 맞았다. 잠시나마 엄마의 부재로 인해 느꼈던 불안감과 외로움을 잊기 위해 그런 잡동사니들을 꺼내놓고 놀았을 것이다. 그때 그 아이처럼.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올 즈음 아이의 엄마는 발길이 뜸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겨울로 접어들자 아이는 눈에 띄게 생기를 잃어가더니 문밖출입을 거의 하지 않았다.
어느 날 점퍼차림의 남자가 문을 두드렸다. “요 앞집에 사는 ㅇㅇㅇ씨 요즘 집에 오지 않습니까? 저렇게 어린 딸하고 장애인 남편 까지 두고 어디 멀리 도망간 것 같지는 않은데 말입니다.” 남자는 형사였고, 내게 아이의 엄마가 오면 알려달라며 연락처를 남기고 갔다. 아이 엄마는 돈 많은 노인을 상대로 값비싼 옷과 금품을 받아 챙긴 뒤 대가?를 치르지 않아 사기사건으로 고발접수 되었다는 것이다.
해가 바뀌고 며칠째 한파가 몰아치던 1월 중순경이었다. 아이는 여름슬리퍼를 신고 빨갛게 언 손등을 호호 불면서 골목에 서 있었다. 삼촌을 기다린다며.
다음날 저녁. 우리 집 골목입구에 낯선 타이탄트럭이 세워져 있었고, 앞집 아주머니와 시장사람 몇몇이 트럭주변에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세상에 저 째깐한 것이 속이 어찌나 깊은지 나헌티 돈 오천원 꿔다가 지 아버지 밥해주믄서 버티더라니끼.
전라도에서인가 3년 전에 이사와 방앗간 일을 하는 앞집 아주머니의 말을 들으며 사람들은 “아이고” 혹은 “세상에” 라는 감탄사를 연발했다.
올 때도 그랬지만 갈 때도 종이박스 몇 개와 이불보따리를 싣고 나니 이삿짐 나르는 일이 끝났다. 이어 동생의 부축을 받으며 아이의 아버지가 운전석에 올랐다. 그때 아이가 삼촌의 팔을 잡아 흔들며 뭐라 귓속말을 했고, 그 삼촌이 지갑에서 천원지폐 몇 장을 꺼내 트럭 곁에 서있던 앞집 아주머니를 향해 내밀었다. 앞집 아주머니는 그 돈을 다시 아이에게 건네줬다. 나중에 학교 입학할 때 학용품사서 쓰라며.
그 아이가 떠나고 나서 더 이상 형사도 찾아오지 않았다. 아이의 엄마가 잡혔거나 아니면 하찮은 사건이라 수사가 흐지부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로부터 2년 뒤, 나는 결혼과 함께 제주시로 거주지를 옮겨왔고 더 이상 그 아이의 뒷얘기도 듣지 못했다. 다만 당시 처녀였던 내가 이제 딸아이 셋을 낳은 어머니가 되었고, 삶의 고통과 절망의 문턱을 두루 거치다가 우연히 기억해낸 그 아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긴 했지만 기다림으로 이어졌던 슬픔과 고통의 흔적들이 오로지 그 아이 것만이 아니라는 생각에 코끝이 시큰거렸다.
|||